'농農익는 대화'를 통해 농본이 가진 질문에 대한 답을 구하는 인터뷰를 담을 예정이다.
농본을 후원하는 회원 다수가 도시에 살고 있다. 이는 어찌 보면 당연한 결과일 수 있다. 2025년 1월 3일 행정안전부 발표에 따르면 우리나라 인구의 약 51%가 서울, 경기, 인천 등 수도권에 살고 있다. 수도권이 아니더라도 대다수 사람이 농촌이 아닌 도시에 살고 있다. 2024년 통계에 따르면 전체 인구의 18.5%만이 농어촌에 거주한다고 한다. 대부분의 사람이 농촌에 살지 않을뿐더러 농사 경험은 더더욱 없는 상황에서 어떻게 농촌과 농민의 이야기를 공유할 수 있는가? 이 질문은 점점 농본의 중요한 문제가 되어가고 있다.
이번 농農익는 대화에서는 '삼척에서 태어났지만, 대부분의 삶을 도시 사람으로 살아온', '《녹색평론》을 20년째 구독 중인', '연극과 영화 대본을 쓰다 글쓰기 선생님, 쿠팡 배달부를 거쳐 쌍둥이 아이를 키우는 전업주부가 된' 김덕수 농본 회원의 이야기를 담았다. 한 명의 도시 사람으로 농본을 후원하는 김덕수 님의 이야기를 통해 질문에 대한 실마리를 찾을 수 있길 바란다.
해녀도 바닷가까지는 도롱이를 입는다
본격적으로 인터뷰를 해보겠습니다. 이번 인터뷰는 농본 회원의 이야기를 들어본다는 취지에서 기획되었습니다. 김덕수 회원님 간단하게 자기소개 부탁드려요.
반갑습니다. 저는 경기도 고양시 일산에 살고 있고 초등학교 졸업하는 쌍둥이 아들이 있고요. 그 아들들 밥해주고 빨래하고 청소하는 전업주부입니다. 올해로 전업주부 4년 차 되는 것 같습니다. 그전에는 연극이나 영화 대본 쓰는 일을 했고요. 지금은 좀 쉬고 있습니다. 그리고 또 하나 말씀드릴 것은 《녹색평론》 독자입니다.
중요한 정체성이죠.
네, 《녹색평론》 독자고 어느새 구독한 지 20년 됐더라고요. 사람도 20년 사귀기가 쉽지 않은데 열심히 읽은 독자라고 할 수는 없지만 그래도 20년이나 한 잡지를 봐왔다는 게 저 스스로도 참 대단한 일인 것 같습니다.
고향은 서울이신가요?
고향은 강원도 삼척입니다. 초등학교 들어갈 때 그러니까 8살 때 서울로 올라왔어요. 시골 사람들은 자꾸 중앙으로 가야 된다, 뭐 도시에서 공부해야 된다 그런 게 있잖아요. 그러니까 저도 농촌에서 산 경험이 거의 없죠. 농촌 풍경이 기억에 있고 익숙하기는 하지만, 초등학교 입학 전이고 너무 어릴 때라 농촌에 대한 구체적인 경험이나 농사 경험도 없고요. 그래서 처음에 인터뷰 제안을 받고 많이 망설였죠. 도시에 살더라도 농촌에 대한 이해가 있고 경험이 있는 분들이 하는 게 낫지 않나 싶었는데요. 하여튼 열심히 이야기해보겠습니다.

전환의 토대, 농촌의 생명력
도시에 사는 농본 회원분들도 많으니 오히려 도시에 사는 사람의 시선에서 바라보는 농촌과 농본의 이야기를 담아보면 좋겠다는 생각에 인터뷰를 요청 드리게 됐습니다. 농본이 활동한 지 햇수로 4년이 되어가는데요, 어떤 계기로 농본 후원을 시작하게 되셨을까요?
처음 접한 것은 농본이 생길 때쯤인 것 같아요. 어제 찾아봤더니 농본을 시작하기 직전에 하승수 대표께서 《녹색평론》에 글을 한 편 쓰셨어요. <농(農)과 자치, 민주주의>라는 제목인데 거기서 처음 산업폐기물 문제에 대한 이야기를 읽고 깜짝 놀랐어요. 이제 농촌에 쓰레기까지 갖다 버리는구나, 그리고 그게 어느 한 지역의 문제가 아니라 많은 마을에서 벌어지고 있는 문제라고 하니까 그때 충격을 받았죠. 그다음에 컨테이너가 생겨서 그곳에 농본 사무실을 연다는 소식을 들었어요. 제가 생각이 짧아서 후원 이런 게 있는지도 모르다가 어느 날 누가 알려주더라고요. 그래서 소액이라도 후원하기 시작했죠.
그러니까 제가 농촌에 살지도 않고 농민에 대한 경험이나 기억도 없는데 그나마 관심을 두게 된 건 다 《녹색평론》 덕분이죠. 도시에 사는 사람들, 특히 어릴 때 농촌에 살아본 경험이 없는 사람들은 대다수가 아마 저와 비슷하지 않을까 생각해요. 농촌에 관한 이야기를 하는 다른 매체는 거의 본 적이 없어요. 아무튼 산업폐기물 처리장 이야기가 상당히 충격적이었던 게 하 선생님이 식민지라는 표현을 쓰셨던데, 지금 우리나라에서 농촌이 수도권의 식민지가 되었다는 게 굉장히 와닿았어요.
이야기가 좀 돌아갈 수도 있는데, 예를 들면 저는 아파트 단지에 사는데 명절이 지나고 나면 정말 아파트 주차장에 쓰레기가 산처럼 쌓여요. 선물상자니 뭐니 쓰레기 더미를 보고 있으면 두려워요. 세상이 이렇게 가도 되나, 정말 두려운 생각이 드는데, 누구 탓할 수도 없죠. 나도 그 자리에 쓰레기 버리러 나갔으니까. 세상이 이렇게 가도 되나 싶은데, 그런 문제부터 해서 기후위기 문제도 대응하는 걸 보면 조금도 바뀌지 않잖아요. 상당히 절망적인 상황이지요. 그리고 답도 잘 안 떠오르는 문제죠.
그럼에도 절망, 무력감에 무너지지 않고 할 수 있는 행동을 한다는 사실 자체로 저는 농본이 엄청난 일을 하는 거라고 생각을 해요. 사실 농민과 농촌을 위한 공익법률단체는 최초잖아요. 이런 곳이 없었다는 것도 상당히 충격적이었고 이런 일을 찾아서 한다면 이것은 단순히 그냥 할 일을 하는 정도가 아니라 상당히 창조적인 아주 적극적인 행동이라고 생각해요.
억울한 일을 당한 농민을 자문하고 법률적으로 지원하는 것도 당연히 도움이 되죠. 그런데 조금 더 생각해 보면 농본의 활동이 그 정도 의미에 그치는 게 아니라 전환의 토대를 지키는 활동을 하는 거라 생각해요. 세상이 계속 이렇게 갈 수는 없고 뭔가 전환을 해야 하잖아요. 그때 전환의 토대랄까 기반이랄까 이런 게 있어야 할 텐데, 그게 농촌이라고 생각하거든요. 그러니까 단순히 농지를 조금 더 지키고 농촌을 조금 더 지키는 문제가 아니라 농촌이 없어지면 그런 전환의 가능성 자체가 아예 사라지는 게 아닌가. 도시에 사는 사람들도 술자리나 이런 데서 들어보면 은퇴 후에 시골 가서 살고 싶다. 이런 이야기를 하시는데요, 하여튼 농촌이 아직 있으니까, 마음속에 그런 꿈이라도 꿀 수 있는 거 아닐까요? 전환을 꿈꾸는 것 자체가 농촌이 아직 있으니까, 우리가 그런 상상을 할 수 있는 게 아닐까 싶어요. 도시만으로는 무슨 전환을 어떻게 하겠어요. 그런 점에서 관심을 두게 됐고 제가 한 건 없지만 마음으로 응원하고 있습니다.
농본이 농본 홈페이지를 통해서나 농본레터를 통해서 소식을 전하고 있는데 그런 농본의 활동 중에 기억에 남은 활동이 있으실까요?
괴산군 김용자 이장님 인터뷰는 성공 사례라 그런지 기억이 나고, 그다음에 서울에서 집회한 적 있잖아요. SK하고 태영 앞에서요. 그게 기억에 남네요. 도시 사람 중에 나쁜 사람들도 있겠지만 그것보다는 몰라서 그런 게 큰 것 같거든요. 지금 농촌 상황이 어떤지를 전혀 모르니까요. 그러니까 농촌의 희생에 기반해서 도시에 사는 우리가 여러 가지 편리와 풍족한 생활을 누리고 있다는 이런 구조적인 문제에 대한 인식이 저는 도시 사람들에게 없다고 봐요. 예를 들면 시국이 이러니까 사람들이 모이면 정말 세상 걱정, 나라 걱정 많이 하잖아요? 그중에 농촌 얘기하는 사람은 한 명도 못 봤어요.
다만 정상적인 사람들이라면 농본을 통해 이런 농촌의 현실을 듣는다면 달라질 거라 생각하는 거죠. 그러니까 서울에서 집회를 열어 농촌 주민들이 마이크를 잡고 직접 이야기할 수 있는 자리를 만드는 활동들, 농촌의 이야기를 이슈화하고 도시 사람들에게 알리는 것도 농본의 중요한 역할이라 생각해요.
그리고 추가로 이야기하고 싶은 건 하승수 대표님도 귀촌하셨잖아요. 다른 농본 활동가분들도 모두 농촌에 사시고요. 제가 생각하기에는 농본 활동의 힘이 농촌에 살기 때문에 유지되거나 생겨나는 게 아닐까 싶어요. 도시 생활이라는 게 심하게 얘기하면 기본적으로 반생명적이죠. 자기 생명을 끊임없이 억압하고 통제해서 자신의 자연스러운 생명을 어떻게든 가다듬어서 팔 수 있는 상태로 만들어야 하잖아요. 쉽게 얘기하면 밖에 나오면 계속 연기를 해야 되는 거예요. 자기를 연출하고. 그러니까 도시에는 농촌과 같은 생명력이 없죠.
우리에게 《사랑의 기술》로 잘 알려진 에리히 프롬이라는 사상가가 있잖아요. 얼마 전에 우연히 헌책방에 갔다가 에리히 프롬의 책을 발견했어요. 제목이 《우리는 여전히 삶을 사랑하는가》인데, 눈에 확 들어오더라고요. 1960년대 초반 냉전 시기, 핵전쟁의 위협이 극에 달했을 때 거의 하룻밤 사이에 일필휘지로 썼다는데, 바로 눈앞에 있는 핵전쟁의 위협을 뻔히 보면서도 왜 사람들이 아무 반응을 안 하는지, 왜 이렇게 무감각한지 질문하며 사람들의 심리 상태를 분석하는 책이었어요. 저자의 분석은 사람들이 더 이상 삶을 사랑하지 않기 때문이라는 겁니다. 아까 말씀드렸다시피 끊임없이 자기 생명을 억압하고 살다 보니까 자기도 모르게 죽음을 좋아하고 잘 통제된 죽어있는 것들을 좋아한다는 거예요. 통제되지 않은, 날것의 살아있는 것들을 두려워하고 질서 잡히고 시스템화된 것들을 좋아하는 심리 상태가 저한테는 도시 생활의 특성을 잘 짚어낸 것처럼 느껴지더라고요. 그런 점에서 비록 많이 파괴되었지만, 농촌은 도시보다는 생명력이 남아있지 않을까, 그게 희망이 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해요.

농촌과 도시 사이의 거리
도시 사람들이 농촌이나 농사에 대해서 생각할 기회가 참 적다는 생각이 드네요. 도시텃밭, 농부장터 마르쉐 등 도시에서도 농촌이나 농사를 생각하는 사람들이 그래도 있는 것 같은데 어떻게 생각하세요?
도시텃밭은 저도 지인들 하는 따라가 본 적은 있는데요. 제가 그런 자리 가면 아직도 제일 막내예요. 50살인데 말이죠. 그러니까 상당히 고령화돼 있어요. 옛날에 젊은 사람들이 홍대에서 도시텃밭을 한 적도 있거든요. 그런 곳은 젊은 사람들도 좀 오고 그랬는데, 일산·고양·파주 지역에서 텃밭 분양을 받아서 하시는 분들은 좀 나이가 있는 어른들이 많은 것 같습니다.
그리고 도시에 사는 우리 아이들이나, 아이 친구들 보면 농촌에 관한 경험이 여행 말고는 없어요. 그러니까 얘들은 해외여행 가서 보는 외국 풍경이나 마찬가지로 농촌 풍경이 생경한 거죠. 외국인처럼 우리 농촌이나 농민들도 낯설게 보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해요. 그만큼 감이 없어요.
그리고 먹는 문제에 대해서도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감각이 참 달라요. 어떤 분이랑 날씨 얘기하다가, 제가 이상기후가 점점 일상이 되면 농사 어떻게 하냐, 농작물이 제대로 자랄까 걱정하면 너는 뭐 그런 생각까지 하냐 그래요. 이 정도로 도시 사람들은 농사나 농촌뿐 아니라 먹거리에 대한 생각이 자기 현실 바깥에 있어요. 그런데 이게 자기가 먹는 것만 생각해도, 예를 들어 직거래로 농산물을 받아먹기만 해도 충분히 할 수 있는 생각이잖아요. 도시에서도 꼭 텃밭을 하지 않더라도, 주말농장을 하지 않더라도 먹는 문제에 조금 더 관심을 가져보면 농촌에 대한 관심으로 이어질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해요. 한편으로는 어떤 전체적인 그림이랄까요, 우리 사회 전체에서 농사가 가지는 의미와 농촌이 망가지고 있는 현실을 알 수 있는 정보들을 확산할 필요가 있을 것 같아요. 왜냐하면 그런 정보 자체가 별로 없으니까요.
저는 농촌에 살고, 농본 활동을 하고 있다 보니 농사나 농촌에 대한 이야기가 얼마만큼 사회에서 회자되는지 오히려 가늠하기 어려운 것 같아요. 그러니까 작년 같은 경우에는 먹거리 물가 상승이 꾸준히 이슈가 되었는데 이와 관련해서 도시에서도 농촌이나 농사에 대한 이야기가 있었을까요?
잠깐씩 이야기는 하죠. 그런데 ‘그냥 농산물 가격이 올라서 못 먹겠네’, ‘물가가 올라서 살기 힘들다’ 이상으로 나아가기 위해서는 정보가 조금 더 필요한 게 아닌가 싶어요. 우루과이 라운드, FTA 등 농산물 수입 개방을 할 때의 논리가 우리는 자동차 팔아서 농산물 수입해서 먹으면 된다 이런 논리였던 것으로 기억해요. 지금도 도시에 사는 사람들 상당수가, 심지어 정치적으로 진보적이라는 사람들도 여전히 그런 이야기를 해요. 농산물 수입하면 되지 않냐. 그러니까 우리 사회가 진보 보수 떠나서 기본적으로 경제 성장을 얘기하잖아요. 그런데 그런 논리 안에서는 농산물은 사 먹으면 된다는 인식이 달라질 수 없는 것 같아요. 그게 농촌이랑 멀리 떨어져 있는 한계 때문이라고 봐요. 농촌을 한 번도 안 가본 어린아이들 같은 경우는 아예 그런 감수성이 있을 리가 없죠. 그리고 또 지금의 사회가 뭐든 대량 생산하고 대량으로 버리는 시스템이잖아요. 먹는 것도 예외는 아니죠. 먹을 것들이 너무 많잖아요. 음식물 쓰레기가 엄청나요. 음식 귀한 거 알 수가 없죠. 뭐든 과잉돼 있으니까 이게 소중하다는 생각을 아마 못할 거예요.
또 도시 생활이 복잡하잖아요. 인간관계도 너무 복잡하고 사는 것 자체가 너무 복잡하죠. 그 속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은 소위 시장에서 가치가 있어야 하기 때문에 끊임없이 자기를 연출해야 하는 입장에 있다 보니 근본적인 사실 기초적인 사실들에 대해서는 잊고 사는 것 같아요. 아주 쉬운 말로 하면 내가 먹는 음식이 나잖아요. 내가 먹는 밥이 이 몸을 이루고, 밥심으로 보고 듣고 느끼고 생각하고 살고 이렇게 대화도 하고 살아가는 건데 말이죠. 그러니까 우리가 나이, 성별, 직업 이런 모든 구별을 떠나서 인간으로서 가장 근본적인 사실은 내가 하나의 생명이고, 그 생명이 밥으로 유지되는데 그 사실을 전혀 생각 못 하는 것 같아요.
하다못해 농촌이나 농업에 대해 하나도 모르고 그냥 순수하게 이기적으로 자기만 생각하더라도 먹는 게 그대로 내가 되잖아요. 그러면 농산물을 외국에서 수입해서 먹으면 된다는 얘기는 결국 나도 그냥 외국에서 수입해서 쓰면 된다, 이런 얘기 아닌가요? 나한테 주어져 있는 생명이 당연하다는 듯이 생각하고, 밥도 어디 하늘에서 뚝뚝 떨어지는 줄 알고 그러는 거죠. 지금 도시에 사는 우리가 먹는 밥이라는 게 햇반을 박스로 사놓고 전자레인지에 1분, 2분 돌리면 뚝딱 나오니까 물리적으로 그렇게 생각할 수밖에 없는 거죠. 또 지금 먹방이 유행이죠. 그런데 먹방을 보면 미각, 미식에만 관심이 있지 먹는 행위 자체는 전혀 주목하지도 않고, 어떤 의미인지 생각해 보지도 않죠. 자기가 생명이라는 걸 잘 못 느끼고 사는 것 같아요. 그러니까 AI로 대체해도 된다고 생각하겠죠. 그리고 거기에는 도시 생활의 압박이 끊임없이 자기가 생명이라는 것을 잊게 하고 팔리는 상품으로 만들기 때문이 아닌가 생각해요.


말씀을 듣다 보니 문득 궁금하네요. 《녹색평론》과 농촌에 사는 지인들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귀촌을 생각하셨던 적이 있나요? 고향도 삼척이라는 지역이니까요.
귀촌을 생각한 적도 있어요. 오래된 일인데요. 제가 처음 《녹색평론》을 구독한 게 학교 졸업할 때쯤인데요. 학교 선생님 한 분이 제자 몇 명한테 《녹색평론》을 1년간 정기 구독 시켜주셨어요. 그런데 그때는 연극을 하는 사람들이 워낙 술도 많이 먹고 또 잡일이 많아요. 그래서 거의 못 봤어요. 그러다 그 선생님이 일찍 돌아가셨어요. 그러고 나니까 선생님에 대한 그리움 같은 것도 있고 죄송함도 있고 그래서 선생님이 구독시켜 준 《녹색평론》을 그때 봤어요. 선생님 돌아가시고 나서야 '나랑 이런 얘기를 하고 싶어 하셨구나, 이런 얘기에 목이 말라서 그렇게 외로워하셨구나' 하면서 읽다가 저도 《녹색평론》에 완전히 반하게 되었죠. 하여튼 한 1, 2년 완전히 새로운 세계를 본 것처럼 느껴지고 그랬어요. 그때 어떻게 지역에 가서 연극을 할 방법이 없을까 궁리하며 삼척에 갈 생각을 했었죠. 그러니까 연극을 그만둔다는 생각은 제가 못했어요. 그런데 귀촌해서도 연극을 하려면 내가 혼자 가는 게 아니라 단체가 가야 하잖아요. 가서 농사도 짓고 거기서 공동체 예술을 해보자 이런 생각이 있었는데, 실천을 못 했죠.
그때 그런 꿈을 한 몇 년간 꾸다가 안 되니까 무기력해지고 우울해지고 나 스스로 애매한 사람처럼 느끼게 되었어요. 도시에 살면서도 여기에 확실히 소속돼서 열심히 사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여기를 벗어나지도 못하고 그러니까 무기력과 우울증이 찾아왔죠. 그러다가 아이들을 만나고 점차 시간이 지난 거죠. 가족들은 도시를 벗어날 생각을 안 하거든요. 그냥 그런 쪽으로는 자포자기하고 살게 되는 것 같아요. 그게 절대 건강한 삶이 될 수 없죠. 마음속에 이런 게 억압이거든요. 아예 시도도 못 해보고 그냥 이렇게 묻어버린 상태니까 뭘 해도 별로 신이 나지 않는다고 해야 할까요?
사람은 어쩔 수 없이 어떤 의미를 추구하며 산다고 그러더라고요. 진화 과정상 의미와 목적을 추구하게 되어 있는데, 의미라는 게 지금 현재에서만 생기는 건 아니거든요. 어떤 미래를 내가 그릴 수 있을 때 그때 과거와 현재, 미래가 동시에 하나의 흐름을 이루고 그 맥락 속에서 지금, 이 삶이 어떤 의미를 가지게 되니까요. 그런데 그런 걸 할 수 없으니 무기력하고 우울하고 그러다가 요즘 다시 그런 생각이 조금씩 들기는 해요. 왜냐하면 결혼도 하고 애들도 낳고 도시에서 이렇게 살다 보니까 애들 키운다고 연극을 그만두고 영화 일을 몇 년 했어요. 그리고 글쓰기 강의, 연극 수업을 많이 했죠. 그것도 한 15년 했어요. 물론 몇 년 전에 다 그만뒀어요. 결정적으로 코로나가 유행하고부터 연극 수업을 진행할 수가 없었어요. 연극 수업을 줌으로 하라고 하더라고요. 그때 이야기를 잠깐 하면, 어느 대학에 외국인 유학생들을 위한 어학당이 있었어요. 제가 맡은 수업은 어학당 3년 과정의 마지막 학기에 있는 한국어로 연극을 하는 수업이었어요. 대부분의 학생이 중국 유학생들이었는데, 이 친구들이 유학 올 때 기대와 달리 되게 재미없이 살아요. 한국말이 좀 되는 친구들은 알바도 하고, 한국 친구도 사귀는데 말이 안 되는 사람들 대부분은 그냥 기숙사에 갇혀서 맨날 기숙사랑 학생식당만 왔다 갔다 하거나, 주방 설거지나 공장에서 알바하고 되게 재미없게 살아요. 그러니까 그 사람들한테 마지막 학기에 하는 연극 수업이 정말 재미있는 거예요. 제가 가끔 우리 시를 칠판에 써줬었거든요. 그런데 그중 한 명이 자기들은 국문과로 유학 왔는데 처음 이런 수업을 들어본다는 거예요. 그러니까 어학당이라고 ‘한국어’만 배운 거죠. 그래서 저도 그렇고 학생들도 상당히 좋아하는 수업이었는데 코로나가 유행하기 시작하니까 중국 유학생들을 기숙사에서 나오지 못하게 격리해 버리더라고요. 초기에 우한 폐렴이라고 불리면서 중국인들을 좀 안 좋게 보고 그랬잖아요.
그래서 줌으로 수업하는데 학생들이 매일 우는소리 하는 거예요. 그래서 제가 학교 측에 여러 번 건의했지만, 학교 측은 계속 줌으로 수업을 진행하라는 거예요. 나중에 공대 실험 수업같이 부분적으로 대면을 허용할 때도 안 해주더라고요. 학생들이 등록금 투쟁 안 할 정도로 적당히 때우면 되지 왜 그렇게 뭘 하려고 그러냐, 이런 느낌이었어요. 그래도 그냥 물러설 수는 없어서 이번 학기 수업을 영상으로 대체하되 학생들이 꼭 하루는 만나고 싶어 하니, 마지막 날만은 관객 없이 극장에서 하루만 우리끼리 모여서 연극하고 촬영할 수 있게 해달라고 요구했는데 그것마저 안 해주더라고요. 그런 일련의 과정을 겪으면서 여러 생각이 들더라고요. 대학이라는 건 뭐고, 학생을 어떻게 대하고 있고, 또 그 속에서 강사 신분은 어떻고. 그래서 그 학교만 그만두는 게 아니라 강사 생활을 아예 접었어요. 얼마 지나서 시나리오 쓰는 일도 다 접고 이제 몸을 써서 돈벌이하겠다 해서 쿠팡 배송 일도 하고 물류센터에 가서 나르는 일도 하고 그러다가 전업주부가 됐죠.
그러니까 핵심은 제가 한 번도 상상해 보지 못한 일을 한 거예요. 연극을 그만둘 거라 한 번도 생각해 본 적이 없는데 어느 순간 그만뒀더라고요. 그러니까 좀 홀가분하더라고요. 이제는 제가 어디 가도 되겠다 싶어요.
농촌의 문화적 자립을 꿈꾸다
지인 중에 스페인어과 교수님이 계시는데요. 귀촌 생각이 있으셔서 홍동에도 몇 번 오셨어요. 그런데 농촌에 와서 스페인어로 먹고살 수 있는가 생각하는 순간 선택이 어려워지더라고요. 그러니까 자신이 도시에서 하던 일로 농촌에서 먹고살 수 있나 생각하면 쉽지 않은 것 같아요. 확실히 그런 생각을 조금 내려놓으면 보다 적응하기 쉬운 것 같고요. 그런데 지금까지 이야기 나눈 걸 돌아보면 일반 대중에게 농촌이나 농사의 가치를 설명하는 건 참 어렵다는 생각이 드네요.
너무 부정적으로 생각할 필요는 없을 것 같아요. 아까도 얘기했지만 도시 사람들이 몰라서 그런 게 제일 큰 것 같아요. 접하지 못하니까요. 예를 들면 제가 글쓰기 수업으로 먹고살 때 온갖 글쓰기 수업을 했는데, 농촌이 배경인 작품, 농민이 나오는 이야기 한 편도 본 기억이 안 나요. TV나 영화도 전부 도시 사람들 이야기잖아요. 도시 생활 못지않게 농촌 생활에도 희로애락이 다 있는데 말이죠. 그러니까 소설이나 문화 자체의 식민주의가 상당히 심한 것 같아요. 문화적인 식민주의가요. 그래서 산업폐기물 매립장이나 농촌이 처한 심각한 위기뿐만 아니라 그냥 농촌, 농촌의 삶, 농민, 농사에 대해서 그 의미와 가치를 소개할 필요가 있다고 봐요. 농본이 그런 걸 연결하는 다리 역할도 좀 할 수 있지 않을까 기대하고요.
몇 해 전에 《녹색평론》에 실린 김탁환 소설가의 <마을과 소설가>라는 글을 봤는데요, 그분이 전남 곡성에 귀농을 하셔서 본인 작업만 하는 게 아니라 마을 주민들이랑 글쓰기 수업도 하고, 마을 영화제도 열고 하는 이야기를 쓰셨더라고요. 글을 보면 단순히 도시에서 만들어진 문화를 소비하는 게 아니라 글쓰기 수업을 통해서 마을의 이야기를 자연스럽게 나누잖아요. 큰 사회적 갈등을 이슈화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와는 별개로 김탁환 선생님이 이야기하셨듯 문화의 자급도 중요한 것 같아요.
그러니까 도시에서 만들어진 이야기들을 소비하는 게 아니라 농촌에서 농촌의 이야기를 스스로 만들어내고 그걸 도시 사람들도 자꾸 접하다 보면 농촌의 중요성, 농민의 목소리가 전달될 수도 있지 않을까요? 당연히 그 안에는 현재 농촌의 힘든 현실, 농민들이 처해 있는 어려움이 자연스럽게 녹아나겠죠. 먹고사는 논리로 느껴지지 쉬운 신문 기사와는 다른 방식의 이야기인 거죠. 그러면 도시 사람들이 조금은 달라지지 않을까 생각해요. 김탁환 소설가의 경우도 그렇고 연극을 지방에 가서 하는 분들도 꽤 있어요. 마을 연극이라는 이름으로 같이 자신들의 이야기로 대본을 쓰고, 마을회관 빌려서 연말에 공연하는 거죠. 그냥 이렇게 하다 보면 마을 사람끼리 지난 세월을 돌아보게 되고 또 그걸 발표하면서 같이 나누게 되고, 저 얘기를 쟤는 저렇게 생각하고 있었구나! 깨닫기도 하고. 그래서 그런 글과 이야기들이 농본레터에 실린다면 좋지 않을까 상상해 보는 거죠.
지금처럼 촉박한 상황에 그게 말이 되냐 이럴 수도 있지만 할 수 있는 일을 하는 거죠. 책에서 봤는데 이런 말이 있더라고요. ‘해녀도 바닷가까지는 도롱이를 입는다.’ 도롱이라는 게 짚으로 엮어서 비 올 때 머리에 뒤집어쓰는 일종의 비옷 같은 건데요. 그러니까 해녀가 곧 물에 들어가 다 젖게 될 걸 알면서도 바닷가까지는 비를 피하기 위해 도롱이를 입는다는 거죠. 민중들은 곧 죽을 걸 알면서도 삶을 절대 함부로 하거나 무시하지 않는다는 거예요.
절망감이라는 것도 생각에 지나치게 의존할 때 생기는 것 같아요. 절망감이라는 게 결국 내 생각일 수도 있어요. 그러니까 그냥 자기의 좁은 한계 안에서, 자기가 가진 지식으로 생각하는 거잖아요. 그 안에서 해결책이 안 나온다고 그래서 반드시 끝날 거라고 믿는 것도 참 섣부른 판단이 아닐까요. 그래서 너무 절망할 필요도 없는 것 같아요.
이제 마지막 질문인데요. 만약에 지인에게 농본이라는 단체를 소개한다면 어떻게 말씀해주실 수 있을까요?
세속적으로 얘기하자면 ‘보험을 드는 거다.’ 농본이 하는 일이 농촌이 없어지지 않게 지키는 거잖아요. 그러니 나중에 농촌으로 가서 살고 싶은 꿈을 꾸는 분이라면 농본이라는 보험을 드시라고 말할 것 같아요. 농촌이 다 매립장으로 바뀐 다음에는 어디로 갈 거예요? 저는 농촌이 전환의 토대라는 생각을 많이 해요. 전환을 꿈꾸는 사람들이라면 반드시 농본의 활동에 관심을 기울이고 또 적극적으로 후원을 해야 하는 게 아닌가 생각합니다.

인터뷰_김덕수, 문수영, 장정우
2025년 1월 22일
'농農익는 대화'를 통해 농본이 가진 질문에 대한 답을 구하는 인터뷰를 담을 예정이다.
농본을 후원하는 회원 다수가 도시에 살고 있다. 이는 어찌 보면 당연한 결과일 수 있다. 2025년 1월 3일 행정안전부 발표에 따르면 우리나라 인구의 약 51%가 서울, 경기, 인천 등 수도권에 살고 있다. 수도권이 아니더라도 대다수 사람이 농촌이 아닌 도시에 살고 있다. 2024년 통계에 따르면 전체 인구의 18.5%만이 농어촌에 거주한다고 한다. 대부분의 사람이 농촌에 살지 않을뿐더러 농사 경험은 더더욱 없는 상황에서 어떻게 농촌과 농민의 이야기를 공유할 수 있는가? 이 질문은 점점 농본의 중요한 문제가 되어가고 있다.
이번 농農익는 대화에서는 '삼척에서 태어났지만, 대부분의 삶을 도시 사람으로 살아온', '《녹색평론》을 20년째 구독 중인', '연극과 영화 대본을 쓰다 글쓰기 선생님, 쿠팡 배달부를 거쳐 쌍둥이 아이를 키우는 전업주부가 된' 김덕수 농본 회원의 이야기를 담았다. 한 명의 도시 사람으로 농본을 후원하는 김덕수 님의 이야기를 통해 질문에 대한 실마리를 찾을 수 있길 바란다.
해녀도 바닷가까지는 도롱이를 입는다
본격적으로 인터뷰를 해보겠습니다. 이번 인터뷰는 농본 회원의 이야기를 들어본다는 취지에서 기획되었습니다. 김덕수 회원님 간단하게 자기소개 부탁드려요.
반갑습니다. 저는 경기도 고양시 일산에 살고 있고 초등학교 졸업하는 쌍둥이 아들이 있고요. 그 아들들 밥해주고 빨래하고 청소하는 전업주부입니다. 올해로 전업주부 4년 차 되는 것 같습니다. 그전에는 연극이나 영화 대본 쓰는 일을 했고요. 지금은 좀 쉬고 있습니다. 그리고 또 하나 말씀드릴 것은 《녹색평론》 독자입니다.
중요한 정체성이죠.
네, 《녹색평론》 독자고 어느새 구독한 지 20년 됐더라고요. 사람도 20년 사귀기가 쉽지 않은데 열심히 읽은 독자라고 할 수는 없지만 그래도 20년이나 한 잡지를 봐왔다는 게 저 스스로도 참 대단한 일인 것 같습니다.
고향은 서울이신가요?
고향은 강원도 삼척입니다. 초등학교 들어갈 때 그러니까 8살 때 서울로 올라왔어요. 시골 사람들은 자꾸 중앙으로 가야 된다, 뭐 도시에서 공부해야 된다 그런 게 있잖아요. 그러니까 저도 농촌에서 산 경험이 거의 없죠. 농촌 풍경이 기억에 있고 익숙하기는 하지만, 초등학교 입학 전이고 너무 어릴 때라 농촌에 대한 구체적인 경험이나 농사 경험도 없고요. 그래서 처음에 인터뷰 제안을 받고 많이 망설였죠. 도시에 살더라도 농촌에 대한 이해가 있고 경험이 있는 분들이 하는 게 낫지 않나 싶었는데요. 하여튼 열심히 이야기해보겠습니다.
전환의 토대, 농촌의 생명력
도시에 사는 농본 회원분들도 많으니 오히려 도시에 사는 사람의 시선에서 바라보는 농촌과 농본의 이야기를 담아보면 좋겠다는 생각에 인터뷰를 요청 드리게 됐습니다. 농본이 활동한 지 햇수로 4년이 되어가는데요, 어떤 계기로 농본 후원을 시작하게 되셨을까요?
처음 접한 것은 농본이 생길 때쯤인 것 같아요. 어제 찾아봤더니 농본을 시작하기 직전에 하승수 대표께서 《녹색평론》에 글을 한 편 쓰셨어요. <농(農)과 자치, 민주주의>라는 제목인데 거기서 처음 산업폐기물 문제에 대한 이야기를 읽고 깜짝 놀랐어요. 이제 농촌에 쓰레기까지 갖다 버리는구나, 그리고 그게 어느 한 지역의 문제가 아니라 많은 마을에서 벌어지고 있는 문제라고 하니까 그때 충격을 받았죠. 그다음에 컨테이너가 생겨서 그곳에 농본 사무실을 연다는 소식을 들었어요. 제가 생각이 짧아서 후원 이런 게 있는지도 모르다가 어느 날 누가 알려주더라고요. 그래서 소액이라도 후원하기 시작했죠.
그러니까 제가 농촌에 살지도 않고 농민에 대한 경험이나 기억도 없는데 그나마 관심을 두게 된 건 다 《녹색평론》 덕분이죠. 도시에 사는 사람들, 특히 어릴 때 농촌에 살아본 경험이 없는 사람들은 대다수가 아마 저와 비슷하지 않을까 생각해요. 농촌에 관한 이야기를 하는 다른 매체는 거의 본 적이 없어요. 아무튼 산업폐기물 처리장 이야기가 상당히 충격적이었던 게 하 선생님이 식민지라는 표현을 쓰셨던데, 지금 우리나라에서 농촌이 수도권의 식민지가 되었다는 게 굉장히 와닿았어요.
이야기가 좀 돌아갈 수도 있는데, 예를 들면 저는 아파트 단지에 사는데 명절이 지나고 나면 정말 아파트 주차장에 쓰레기가 산처럼 쌓여요. 선물상자니 뭐니 쓰레기 더미를 보고 있으면 두려워요. 세상이 이렇게 가도 되나, 정말 두려운 생각이 드는데, 누구 탓할 수도 없죠. 나도 그 자리에 쓰레기 버리러 나갔으니까. 세상이 이렇게 가도 되나 싶은데, 그런 문제부터 해서 기후위기 문제도 대응하는 걸 보면 조금도 바뀌지 않잖아요. 상당히 절망적인 상황이지요. 그리고 답도 잘 안 떠오르는 문제죠.
그럼에도 절망, 무력감에 무너지지 않고 할 수 있는 행동을 한다는 사실 자체로 저는 농본이 엄청난 일을 하는 거라고 생각을 해요. 사실 농민과 농촌을 위한 공익법률단체는 최초잖아요. 이런 곳이 없었다는 것도 상당히 충격적이었고 이런 일을 찾아서 한다면 이것은 단순히 그냥 할 일을 하는 정도가 아니라 상당히 창조적인 아주 적극적인 행동이라고 생각해요.
억울한 일을 당한 농민을 자문하고 법률적으로 지원하는 것도 당연히 도움이 되죠. 그런데 조금 더 생각해 보면 농본의 활동이 그 정도 의미에 그치는 게 아니라 전환의 토대를 지키는 활동을 하는 거라 생각해요. 세상이 계속 이렇게 갈 수는 없고 뭔가 전환을 해야 하잖아요. 그때 전환의 토대랄까 기반이랄까 이런 게 있어야 할 텐데, 그게 농촌이라고 생각하거든요. 그러니까 단순히 농지를 조금 더 지키고 농촌을 조금 더 지키는 문제가 아니라 농촌이 없어지면 그런 전환의 가능성 자체가 아예 사라지는 게 아닌가. 도시에 사는 사람들도 술자리나 이런 데서 들어보면 은퇴 후에 시골 가서 살고 싶다. 이런 이야기를 하시는데요, 하여튼 농촌이 아직 있으니까, 마음속에 그런 꿈이라도 꿀 수 있는 거 아닐까요? 전환을 꿈꾸는 것 자체가 농촌이 아직 있으니까, 우리가 그런 상상을 할 수 있는 게 아닐까 싶어요. 도시만으로는 무슨 전환을 어떻게 하겠어요. 그런 점에서 관심을 두게 됐고 제가 한 건 없지만 마음으로 응원하고 있습니다.
농본이 농본 홈페이지를 통해서나 농본레터를 통해서 소식을 전하고 있는데 그런 농본의 활동 중에 기억에 남은 활동이 있으실까요?
괴산군 김용자 이장님 인터뷰는 성공 사례라 그런지 기억이 나고, 그다음에 서울에서 집회한 적 있잖아요. SK하고 태영 앞에서요. 그게 기억에 남네요. 도시 사람 중에 나쁜 사람들도 있겠지만 그것보다는 몰라서 그런 게 큰 것 같거든요. 지금 농촌 상황이 어떤지를 전혀 모르니까요. 그러니까 농촌의 희생에 기반해서 도시에 사는 우리가 여러 가지 편리와 풍족한 생활을 누리고 있다는 이런 구조적인 문제에 대한 인식이 저는 도시 사람들에게 없다고 봐요. 예를 들면 시국이 이러니까 사람들이 모이면 정말 세상 걱정, 나라 걱정 많이 하잖아요? 그중에 농촌 얘기하는 사람은 한 명도 못 봤어요.
다만 정상적인 사람들이라면 농본을 통해 이런 농촌의 현실을 듣는다면 달라질 거라 생각하는 거죠. 그러니까 서울에서 집회를 열어 농촌 주민들이 마이크를 잡고 직접 이야기할 수 있는 자리를 만드는 활동들, 농촌의 이야기를 이슈화하고 도시 사람들에게 알리는 것도 농본의 중요한 역할이라 생각해요.
그리고 추가로 이야기하고 싶은 건 하승수 대표님도 귀촌하셨잖아요. 다른 농본 활동가분들도 모두 농촌에 사시고요. 제가 생각하기에는 농본 활동의 힘이 농촌에 살기 때문에 유지되거나 생겨나는 게 아닐까 싶어요. 도시 생활이라는 게 심하게 얘기하면 기본적으로 반생명적이죠. 자기 생명을 끊임없이 억압하고 통제해서 자신의 자연스러운 생명을 어떻게든 가다듬어서 팔 수 있는 상태로 만들어야 하잖아요. 쉽게 얘기하면 밖에 나오면 계속 연기를 해야 되는 거예요. 자기를 연출하고. 그러니까 도시에는 농촌과 같은 생명력이 없죠.
우리에게 《사랑의 기술》로 잘 알려진 에리히 프롬이라는 사상가가 있잖아요. 얼마 전에 우연히 헌책방에 갔다가 에리히 프롬의 책을 발견했어요. 제목이 《우리는 여전히 삶을 사랑하는가》인데, 눈에 확 들어오더라고요. 1960년대 초반 냉전 시기, 핵전쟁의 위협이 극에 달했을 때 거의 하룻밤 사이에 일필휘지로 썼다는데, 바로 눈앞에 있는 핵전쟁의 위협을 뻔히 보면서도 왜 사람들이 아무 반응을 안 하는지, 왜 이렇게 무감각한지 질문하며 사람들의 심리 상태를 분석하는 책이었어요. 저자의 분석은 사람들이 더 이상 삶을 사랑하지 않기 때문이라는 겁니다. 아까 말씀드렸다시피 끊임없이 자기 생명을 억압하고 살다 보니까 자기도 모르게 죽음을 좋아하고 잘 통제된 죽어있는 것들을 좋아한다는 거예요. 통제되지 않은, 날것의 살아있는 것들을 두려워하고 질서 잡히고 시스템화된 것들을 좋아하는 심리 상태가 저한테는 도시 생활의 특성을 잘 짚어낸 것처럼 느껴지더라고요. 그런 점에서 비록 많이 파괴되었지만, 농촌은 도시보다는 생명력이 남아있지 않을까, 그게 희망이 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해요.
농촌과 도시 사이의 거리
도시 사람들이 농촌이나 농사에 대해서 생각할 기회가 참 적다는 생각이 드네요. 도시텃밭, 농부장터 마르쉐 등 도시에서도 농촌이나 농사를 생각하는 사람들이 그래도 있는 것 같은데 어떻게 생각하세요?
도시텃밭은 저도 지인들 하는 따라가 본 적은 있는데요. 제가 그런 자리 가면 아직도 제일 막내예요. 50살인데 말이죠. 그러니까 상당히 고령화돼 있어요. 옛날에 젊은 사람들이 홍대에서 도시텃밭을 한 적도 있거든요. 그런 곳은 젊은 사람들도 좀 오고 그랬는데, 일산·고양·파주 지역에서 텃밭 분양을 받아서 하시는 분들은 좀 나이가 있는 어른들이 많은 것 같습니다.
그리고 도시에 사는 우리 아이들이나, 아이 친구들 보면 농촌에 관한 경험이 여행 말고는 없어요. 그러니까 얘들은 해외여행 가서 보는 외국 풍경이나 마찬가지로 농촌 풍경이 생경한 거죠. 외국인처럼 우리 농촌이나 농민들도 낯설게 보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해요. 그만큼 감이 없어요.
그리고 먹는 문제에 대해서도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감각이 참 달라요. 어떤 분이랑 날씨 얘기하다가, 제가 이상기후가 점점 일상이 되면 농사 어떻게 하냐, 농작물이 제대로 자랄까 걱정하면 너는 뭐 그런 생각까지 하냐 그래요. 이 정도로 도시 사람들은 농사나 농촌뿐 아니라 먹거리에 대한 생각이 자기 현실 바깥에 있어요. 그런데 이게 자기가 먹는 것만 생각해도, 예를 들어 직거래로 농산물을 받아먹기만 해도 충분히 할 수 있는 생각이잖아요. 도시에서도 꼭 텃밭을 하지 않더라도, 주말농장을 하지 않더라도 먹는 문제에 조금 더 관심을 가져보면 농촌에 대한 관심으로 이어질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해요. 한편으로는 어떤 전체적인 그림이랄까요, 우리 사회 전체에서 농사가 가지는 의미와 농촌이 망가지고 있는 현실을 알 수 있는 정보들을 확산할 필요가 있을 것 같아요. 왜냐하면 그런 정보 자체가 별로 없으니까요.
저는 농촌에 살고, 농본 활동을 하고 있다 보니 농사나 농촌에 대한 이야기가 얼마만큼 사회에서 회자되는지 오히려 가늠하기 어려운 것 같아요. 그러니까 작년 같은 경우에는 먹거리 물가 상승이 꾸준히 이슈가 되었는데 이와 관련해서 도시에서도 농촌이나 농사에 대한 이야기가 있었을까요?
잠깐씩 이야기는 하죠. 그런데 ‘그냥 농산물 가격이 올라서 못 먹겠네’, ‘물가가 올라서 살기 힘들다’ 이상으로 나아가기 위해서는 정보가 조금 더 필요한 게 아닌가 싶어요. 우루과이 라운드, FTA 등 농산물 수입 개방을 할 때의 논리가 우리는 자동차 팔아서 농산물 수입해서 먹으면 된다 이런 논리였던 것으로 기억해요. 지금도 도시에 사는 사람들 상당수가, 심지어 정치적으로 진보적이라는 사람들도 여전히 그런 이야기를 해요. 농산물 수입하면 되지 않냐. 그러니까 우리 사회가 진보 보수 떠나서 기본적으로 경제 성장을 얘기하잖아요. 그런데 그런 논리 안에서는 농산물은 사 먹으면 된다는 인식이 달라질 수 없는 것 같아요. 그게 농촌이랑 멀리 떨어져 있는 한계 때문이라고 봐요. 농촌을 한 번도 안 가본 어린아이들 같은 경우는 아예 그런 감수성이 있을 리가 없죠. 그리고 또 지금의 사회가 뭐든 대량 생산하고 대량으로 버리는 시스템이잖아요. 먹는 것도 예외는 아니죠. 먹을 것들이 너무 많잖아요. 음식물 쓰레기가 엄청나요. 음식 귀한 거 알 수가 없죠. 뭐든 과잉돼 있으니까 이게 소중하다는 생각을 아마 못할 거예요.
또 도시 생활이 복잡하잖아요. 인간관계도 너무 복잡하고 사는 것 자체가 너무 복잡하죠. 그 속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은 소위 시장에서 가치가 있어야 하기 때문에 끊임없이 자기를 연출해야 하는 입장에 있다 보니 근본적인 사실 기초적인 사실들에 대해서는 잊고 사는 것 같아요. 아주 쉬운 말로 하면 내가 먹는 음식이 나잖아요. 내가 먹는 밥이 이 몸을 이루고, 밥심으로 보고 듣고 느끼고 생각하고 살고 이렇게 대화도 하고 살아가는 건데 말이죠. 그러니까 우리가 나이, 성별, 직업 이런 모든 구별을 떠나서 인간으로서 가장 근본적인 사실은 내가 하나의 생명이고, 그 생명이 밥으로 유지되는데 그 사실을 전혀 생각 못 하는 것 같아요.
하다못해 농촌이나 농업에 대해 하나도 모르고 그냥 순수하게 이기적으로 자기만 생각하더라도 먹는 게 그대로 내가 되잖아요. 그러면 농산물을 외국에서 수입해서 먹으면 된다는 얘기는 결국 나도 그냥 외국에서 수입해서 쓰면 된다, 이런 얘기 아닌가요? 나한테 주어져 있는 생명이 당연하다는 듯이 생각하고, 밥도 어디 하늘에서 뚝뚝 떨어지는 줄 알고 그러는 거죠. 지금 도시에 사는 우리가 먹는 밥이라는 게 햇반을 박스로 사놓고 전자레인지에 1분, 2분 돌리면 뚝딱 나오니까 물리적으로 그렇게 생각할 수밖에 없는 거죠. 또 지금 먹방이 유행이죠. 그런데 먹방을 보면 미각, 미식에만 관심이 있지 먹는 행위 자체는 전혀 주목하지도 않고, 어떤 의미인지 생각해 보지도 않죠. 자기가 생명이라는 걸 잘 못 느끼고 사는 것 같아요. 그러니까 AI로 대체해도 된다고 생각하겠죠. 그리고 거기에는 도시 생활의 압박이 끊임없이 자기가 생명이라는 것을 잊게 하고 팔리는 상품으로 만들기 때문이 아닌가 생각해요.
말씀을 듣다 보니 문득 궁금하네요. 《녹색평론》과 농촌에 사는 지인들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귀촌을 생각하셨던 적이 있나요? 고향도 삼척이라는 지역이니까요.
귀촌을 생각한 적도 있어요. 오래된 일인데요. 제가 처음 《녹색평론》을 구독한 게 학교 졸업할 때쯤인데요. 학교 선생님 한 분이 제자 몇 명한테 《녹색평론》을 1년간 정기 구독 시켜주셨어요. 그런데 그때는 연극을 하는 사람들이 워낙 술도 많이 먹고 또 잡일이 많아요. 그래서 거의 못 봤어요. 그러다 그 선생님이 일찍 돌아가셨어요. 그러고 나니까 선생님에 대한 그리움 같은 것도 있고 죄송함도 있고 그래서 선생님이 구독시켜 준 《녹색평론》을 그때 봤어요. 선생님 돌아가시고 나서야 '나랑 이런 얘기를 하고 싶어 하셨구나, 이런 얘기에 목이 말라서 그렇게 외로워하셨구나' 하면서 읽다가 저도 《녹색평론》에 완전히 반하게 되었죠. 하여튼 한 1, 2년 완전히 새로운 세계를 본 것처럼 느껴지고 그랬어요. 그때 어떻게 지역에 가서 연극을 할 방법이 없을까 궁리하며 삼척에 갈 생각을 했었죠. 그러니까 연극을 그만둔다는 생각은 제가 못했어요. 그런데 귀촌해서도 연극을 하려면 내가 혼자 가는 게 아니라 단체가 가야 하잖아요. 가서 농사도 짓고 거기서 공동체 예술을 해보자 이런 생각이 있었는데, 실천을 못 했죠.
그때 그런 꿈을 한 몇 년간 꾸다가 안 되니까 무기력해지고 우울해지고 나 스스로 애매한 사람처럼 느끼게 되었어요. 도시에 살면서도 여기에 확실히 소속돼서 열심히 사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여기를 벗어나지도 못하고 그러니까 무기력과 우울증이 찾아왔죠. 그러다가 아이들을 만나고 점차 시간이 지난 거죠. 가족들은 도시를 벗어날 생각을 안 하거든요. 그냥 그런 쪽으로는 자포자기하고 살게 되는 것 같아요. 그게 절대 건강한 삶이 될 수 없죠. 마음속에 이런 게 억압이거든요. 아예 시도도 못 해보고 그냥 이렇게 묻어버린 상태니까 뭘 해도 별로 신이 나지 않는다고 해야 할까요?
사람은 어쩔 수 없이 어떤 의미를 추구하며 산다고 그러더라고요. 진화 과정상 의미와 목적을 추구하게 되어 있는데, 의미라는 게 지금 현재에서만 생기는 건 아니거든요. 어떤 미래를 내가 그릴 수 있을 때 그때 과거와 현재, 미래가 동시에 하나의 흐름을 이루고 그 맥락 속에서 지금, 이 삶이 어떤 의미를 가지게 되니까요. 그런데 그런 걸 할 수 없으니 무기력하고 우울하고 그러다가 요즘 다시 그런 생각이 조금씩 들기는 해요. 왜냐하면 결혼도 하고 애들도 낳고 도시에서 이렇게 살다 보니까 애들 키운다고 연극을 그만두고 영화 일을 몇 년 했어요. 그리고 글쓰기 강의, 연극 수업을 많이 했죠. 그것도 한 15년 했어요. 물론 몇 년 전에 다 그만뒀어요. 결정적으로 코로나가 유행하고부터 연극 수업을 진행할 수가 없었어요. 연극 수업을 줌으로 하라고 하더라고요. 그때 이야기를 잠깐 하면, 어느 대학에 외국인 유학생들을 위한 어학당이 있었어요. 제가 맡은 수업은 어학당 3년 과정의 마지막 학기에 있는 한국어로 연극을 하는 수업이었어요. 대부분의 학생이 중국 유학생들이었는데, 이 친구들이 유학 올 때 기대와 달리 되게 재미없이 살아요. 한국말이 좀 되는 친구들은 알바도 하고, 한국 친구도 사귀는데 말이 안 되는 사람들 대부분은 그냥 기숙사에 갇혀서 맨날 기숙사랑 학생식당만 왔다 갔다 하거나, 주방 설거지나 공장에서 알바하고 되게 재미없게 살아요. 그러니까 그 사람들한테 마지막 학기에 하는 연극 수업이 정말 재미있는 거예요. 제가 가끔 우리 시를 칠판에 써줬었거든요. 그런데 그중 한 명이 자기들은 국문과로 유학 왔는데 처음 이런 수업을 들어본다는 거예요. 그러니까 어학당이라고 ‘한국어’만 배운 거죠. 그래서 저도 그렇고 학생들도 상당히 좋아하는 수업이었는데 코로나가 유행하기 시작하니까 중국 유학생들을 기숙사에서 나오지 못하게 격리해 버리더라고요. 초기에 우한 폐렴이라고 불리면서 중국인들을 좀 안 좋게 보고 그랬잖아요.
그래서 줌으로 수업하는데 학생들이 매일 우는소리 하는 거예요. 그래서 제가 학교 측에 여러 번 건의했지만, 학교 측은 계속 줌으로 수업을 진행하라는 거예요. 나중에 공대 실험 수업같이 부분적으로 대면을 허용할 때도 안 해주더라고요. 학생들이 등록금 투쟁 안 할 정도로 적당히 때우면 되지 왜 그렇게 뭘 하려고 그러냐, 이런 느낌이었어요. 그래도 그냥 물러설 수는 없어서 이번 학기 수업을 영상으로 대체하되 학생들이 꼭 하루는 만나고 싶어 하니, 마지막 날만은 관객 없이 극장에서 하루만 우리끼리 모여서 연극하고 촬영할 수 있게 해달라고 요구했는데 그것마저 안 해주더라고요. 그런 일련의 과정을 겪으면서 여러 생각이 들더라고요. 대학이라는 건 뭐고, 학생을 어떻게 대하고 있고, 또 그 속에서 강사 신분은 어떻고. 그래서 그 학교만 그만두는 게 아니라 강사 생활을 아예 접었어요. 얼마 지나서 시나리오 쓰는 일도 다 접고 이제 몸을 써서 돈벌이하겠다 해서 쿠팡 배송 일도 하고 물류센터에 가서 나르는 일도 하고 그러다가 전업주부가 됐죠.
그러니까 핵심은 제가 한 번도 상상해 보지 못한 일을 한 거예요. 연극을 그만둘 거라 한 번도 생각해 본 적이 없는데 어느 순간 그만뒀더라고요. 그러니까 좀 홀가분하더라고요. 이제는 제가 어디 가도 되겠다 싶어요.
농촌의 문화적 자립을 꿈꾸다
지인 중에 스페인어과 교수님이 계시는데요. 귀촌 생각이 있으셔서 홍동에도 몇 번 오셨어요. 그런데 농촌에 와서 스페인어로 먹고살 수 있는가 생각하는 순간 선택이 어려워지더라고요. 그러니까 자신이 도시에서 하던 일로 농촌에서 먹고살 수 있나 생각하면 쉽지 않은 것 같아요. 확실히 그런 생각을 조금 내려놓으면 보다 적응하기 쉬운 것 같고요. 그런데 지금까지 이야기 나눈 걸 돌아보면 일반 대중에게 농촌이나 농사의 가치를 설명하는 건 참 어렵다는 생각이 드네요.
너무 부정적으로 생각할 필요는 없을 것 같아요. 아까도 얘기했지만 도시 사람들이 몰라서 그런 게 제일 큰 것 같아요. 접하지 못하니까요. 예를 들면 제가 글쓰기 수업으로 먹고살 때 온갖 글쓰기 수업을 했는데, 농촌이 배경인 작품, 농민이 나오는 이야기 한 편도 본 기억이 안 나요. TV나 영화도 전부 도시 사람들 이야기잖아요. 도시 생활 못지않게 농촌 생활에도 희로애락이 다 있는데 말이죠. 그러니까 소설이나 문화 자체의 식민주의가 상당히 심한 것 같아요. 문화적인 식민주의가요. 그래서 산업폐기물 매립장이나 농촌이 처한 심각한 위기뿐만 아니라 그냥 농촌, 농촌의 삶, 농민, 농사에 대해서 그 의미와 가치를 소개할 필요가 있다고 봐요. 농본이 그런 걸 연결하는 다리 역할도 좀 할 수 있지 않을까 기대하고요.
몇 해 전에 《녹색평론》에 실린 김탁환 소설가의 <마을과 소설가>라는 글을 봤는데요, 그분이 전남 곡성에 귀농을 하셔서 본인 작업만 하는 게 아니라 마을 주민들이랑 글쓰기 수업도 하고, 마을 영화제도 열고 하는 이야기를 쓰셨더라고요. 글을 보면 단순히 도시에서 만들어진 문화를 소비하는 게 아니라 글쓰기 수업을 통해서 마을의 이야기를 자연스럽게 나누잖아요. 큰 사회적 갈등을 이슈화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와는 별개로 김탁환 선생님이 이야기하셨듯 문화의 자급도 중요한 것 같아요.
그러니까 도시에서 만들어진 이야기들을 소비하는 게 아니라 농촌에서 농촌의 이야기를 스스로 만들어내고 그걸 도시 사람들도 자꾸 접하다 보면 농촌의 중요성, 농민의 목소리가 전달될 수도 있지 않을까요? 당연히 그 안에는 현재 농촌의 힘든 현실, 농민들이 처해 있는 어려움이 자연스럽게 녹아나겠죠. 먹고사는 논리로 느껴지지 쉬운 신문 기사와는 다른 방식의 이야기인 거죠. 그러면 도시 사람들이 조금은 달라지지 않을까 생각해요. 김탁환 소설가의 경우도 그렇고 연극을 지방에 가서 하는 분들도 꽤 있어요. 마을 연극이라는 이름으로 같이 자신들의 이야기로 대본을 쓰고, 마을회관 빌려서 연말에 공연하는 거죠. 그냥 이렇게 하다 보면 마을 사람끼리 지난 세월을 돌아보게 되고 또 그걸 발표하면서 같이 나누게 되고, 저 얘기를 쟤는 저렇게 생각하고 있었구나! 깨닫기도 하고. 그래서 그런 글과 이야기들이 농본레터에 실린다면 좋지 않을까 상상해 보는 거죠.
지금처럼 촉박한 상황에 그게 말이 되냐 이럴 수도 있지만 할 수 있는 일을 하는 거죠. 책에서 봤는데 이런 말이 있더라고요. ‘해녀도 바닷가까지는 도롱이를 입는다.’ 도롱이라는 게 짚으로 엮어서 비 올 때 머리에 뒤집어쓰는 일종의 비옷 같은 건데요. 그러니까 해녀가 곧 물에 들어가 다 젖게 될 걸 알면서도 바닷가까지는 비를 피하기 위해 도롱이를 입는다는 거죠. 민중들은 곧 죽을 걸 알면서도 삶을 절대 함부로 하거나 무시하지 않는다는 거예요.
절망감이라는 것도 생각에 지나치게 의존할 때 생기는 것 같아요. 절망감이라는 게 결국 내 생각일 수도 있어요. 그러니까 그냥 자기의 좁은 한계 안에서, 자기가 가진 지식으로 생각하는 거잖아요. 그 안에서 해결책이 안 나온다고 그래서 반드시 끝날 거라고 믿는 것도 참 섣부른 판단이 아닐까요. 그래서 너무 절망할 필요도 없는 것 같아요.
이제 마지막 질문인데요. 만약에 지인에게 농본이라는 단체를 소개한다면 어떻게 말씀해주실 수 있을까요?
세속적으로 얘기하자면 ‘보험을 드는 거다.’ 농본이 하는 일이 농촌이 없어지지 않게 지키는 거잖아요. 그러니 나중에 농촌으로 가서 살고 싶은 꿈을 꾸는 분이라면 농본이라는 보험을 드시라고 말할 것 같아요. 농촌이 다 매립장으로 바뀐 다음에는 어디로 갈 거예요? 저는 농촌이 전환의 토대라는 생각을 많이 해요. 전환을 꿈꾸는 사람들이라면 반드시 농본의 활동에 관심을 기울이고 또 적극적으로 후원을 해야 하는 게 아닌가 생각합니다.
인터뷰_김덕수, 문수영, 장정우
2025년 1월 22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