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농農익는 대화'를 통해 농본이 가진 질문에 대한 답을 구하는 인터뷰를 담을 예정이다. 기후위기가 심화되는 가운데 프랑스 철학자 브뤼노 라투르가 명명한 ‘녹색 계급’이란 개념이 주목받고 있다. ‘녹색 계급’을 ‘살아가는 수단으로서의 세계’와 ‘사람들이 살고 있는 장소로서의 세계’를 연결하는 집단이라고 정의한다면, 실제로 우리의 터전에 ‘녹색’을 채워나가는 농민들이야말로 대표적인 ‘녹색 계급’이라고 할 수 있다. 이번 농農익는 대화에서는 지난 20여 년간 꿋꿋이 농사 교육을 해오고 있는 풀무학교 전공부(이하 전공부) 농업교사인 오도 선생님의 이야기를 담았다.
1년 동안 벼를 관찰한 기록, 책이 되다
장정우 전공부 학생들과 함께 1년 동안 벼를 관찰한 기록이 《벼의 일 년》이라는 책으로 출간됐습니다. 지난 6월 3일에는 마을도서관에서 출간기념회가 열리기도 했는데요. 책 소개와 더불어 벼를 관찰하게 된 계기를 설명해주실 수 있을까요?
오도 《벼의 일 년》이라는 제목처럼 벼의 생애를 담은 책이에요. 몇 년 전, 전공부에서 농사 실습을 담당하셨던 선생님 두 분이 은퇴를 하시면서 제가 본격적으로 모든 농사 실습을 도맡게 됐어요. 어릴 적부터 부모님 농사를 도왔고 전공부 농사 실습에 계속 참여해와서 농사일 자체는 익숙하지만, 학생들에게 알려주려니 막상 작물에 대해서 제대로 아는 게 없더라고요. 특히 논농사를 주관하는 건 처음이라 논에서 자라는 벼에 대해서 알아야 했어요. 그래서 자료를 찾는데 우리나라엔 자료가 없었어요. 농법에 대한 건 많은데 벼라는 작물 자체에 대한 건 아무리 찾아도 없는 거예요.
그러던 중 일본에서 발행된 작물 시리즈가 생각났어요. 그 출판사의 시리즈 중에 벼를 주제로 엮은 게 있었어요. 2000년대 초반에 람사르 협약이 맺어지고 논을 습지로 보는 관점이 생기면서 논생물 조사를 마을에서 많이 했거든요. 당시에 우리나라에 자료가 없어서 그 시리즈를 구해서 참고했어요. 마침 그중에 한 권이 벼 관찰에 대한 책이어서 전공부 학생들과 함께 읽기 시작했죠. 그런데 읽다 보니 너무 재밌는 거예요. 제가 전혀 몰랐던 사실들이 나와있어서 책에서 나온 내용이 실제로 그런지 학생들하고 공부하면서 관찰해보자고 이야기가 흘러갔죠. 책에 설명이 되어 있지만 직접 관찰하지 않는 이상 이해가 가지 않는 부분도 있었고요. 그래서 벼 관찰을 시작하게 됐어요.
관찰을 시작할 때는 책으로 만들 생각은 없었어요. 하다 보니 우리가 매일매일 밥을 먹는데 먹는 밥에 대해서, 쌀에 대해서 아는 게 없다는 걸 알았어요. 부끄럽기도 하고 우리나라에 이런 자료가 없다는 게 아쉬웠는데, 학생 중에 우리의 활동을 정리해보고 싶다는 친구가 있어서 부족하더라도 기록을 남기자는 마음으로 책을 만들게 됐어요.
장정우 쌀이 주식이라고 하지만, 도시에 사는 분들이 많기 때문에 벼나 논이 낯선 분들이 많을 것 같습니다. 그런 분들에게 꼭 소개하고 싶은 책의 내용이 있을까요?
오도 제일 기억에 남는 장면은 밥 한 공기에 몇 알이 들어가는지 세어보려고 한 알 한 알 늘어놓았던 거예요. 하루에 이렇게 많은 쌀을 먹고 있구나 하며 새삼 놀랐어요. 밥 한 공기에 벼 세 포기가 들어가는데 하루 세 끼 먹으면 아홉 포기잖아요. 볍씨 한 알이 하나의 식물체가 되는 거거든요. 생각해보면 저도 하나의 생명체고 볍씨도 하나의 생명체인 거예요. 그걸 온몸으로 알아차리고 나니 무섭기도 하고. 제가 하루에 세 끼 먹으면 1만 5천 알을 먹는 건데 1만 5천 개의 생명이 제 몸속으로 들어오는 거잖아요. 볍씨 한 알도 자신의 역할이 있을 거고 하나의 생각이 있을 텐데, 그렇게 따지니까 내가 너무 많이 먹는다… (웃음) 이렇게 살아도 되나 그런 생각이 들기도 했어요.
논에서 벼를 베면 냄새가 나요. 풀을 베도 냄새가 나거든요. 어느 날 학생들과 벼를 베며 냄새가 난다고 막 얘기를 했어요. 그랬더니 전공부 동료 교사였던 장길섭 선생님이 그게 사람으로 따지면 벼가 피 흘리는 거야, 그러셨거든요.(웃음) 걔가 죽어서 내가 살 수 있는 거야, 그런 얘기를 해주셨어요. 지금도 그게 두고두고 생각이 나요. 내가 하루에 이렇게 많은 생명을 먹고 있구나… 볍씨 한 알 한 알 놓으면서 많은 생각이 들었어요.
저는 개인적으로 이 책을 밥 먹는 사람은 다 봐야 한다고 생각해요. 벼라는 작물을 우리가 매일 먹으며 늘상 접하는데 잘 모르고 지나치는 부분이 너무 많은 것 같아요. 누구도 알려주지 않고 가르쳐주지 않기 때문에요.
장정우 그 외에 오도 선생님이 중요하게 생각하는 논 혹은 벼농사의 가치가 있다면 소개해주세요.
오도 우리나라가 식량자급률이 높지 않잖아요.
장정우 네, 최근 발표에 따르면 곡물자급률이 20%까지 떨어졌어요. 이제 밥을 홍콩, 일본보다 덜 먹거나 비슷한 수준이 됐죠. 1인당 쌀 소비량이 60kg 대가 깨졌어요.
오도 1인당 쌀 소비량이 약 56kg 정도로 보더라고요. 어쨌든 자급률이 엄청 낮은데 그중에서 쌀만 90% 이상의 자급률을 유지하고 있죠. 다른 작물에 비해서는 그만큼 우리나라에서 쌀 생산을 많이 한다는 얘기이기도 해요. 실제로 우리가 도시 밖으로 나오면 여전히 논을 쉽게 볼 수 있잖아요.
저는 개인적으로 논이 아름답다는 걸 사람들이 많이 느꼈으면 해요. 텅 빈 겨울의 논도 예쁜데 쟁기질했을 때의 논과 물이 가둬졌을 때의 논, 벼가 심어졌을 때, 벼가 익어가는 때, 각각이 너무 아름답잖아요. 물을 가뒀을 때는 호수 같고 그렇잖아요. 우리가 몰라서 그렇지 논이 주는 아름다움은 우리 한국 사람들한테는 아주 중요한 정서적 바탕일 것 같아요. 논을 보며 아름답다는 말을 입 밖으로 얘기하지 않아도, 논이 주는 경관의 아름다움이 사람들 마음속에 있지 않을까요?
또 하나는 논은 물을 가두잖아요. 기후위기 때문에 지하수가 부족해진다고 하는데, 논은 지하수위를 높일 수 있는 물 저장고 같은 역할을 하거든요. 논에 물을 가두면 증발하면서 공기 중의 습도를 유지해주기도 하고요. 그래서 논은 단지 벼만 생산하는 곳이 아니라, 우리 삶에서 물을 순환시키는 역할도 하는 거죠.
그리고 논에는 다양한 생물이 많아요. 120~150여 종의 논생물이 사는데 작은 생물이 많거든요. 논생물은 먹이사슬에서 가장 기초적인 역할을 해요. 논생물이 없으면 다른 동물이나 생물도 살아갈 수 없는 거죠. 논이 생태계의 기반이 된다는 사실을 사람들이 알면 좋겠어요.
마지막으로 논농사는 다른 농사와 달리 혼자 하기 어렵잖아요. 같이 일을 하는 데서 오는 장점이 있죠. 이웃하고 옆에서 같이 일하는 사람하고 느끼는 그런 것들. 서로 도와가며 해야 한다는 점이요.
농사를 싫어하던 아이가 농업학교의 교사가 되기까지
장정우 그렇다면, 오도 선생님이 가지고 계신 농사에 대한 첫 기억은 어떤 걸까요?
오도 네 살쯤이라고 기억해요. 일을 한 건 아니고 제가 본 장면이 기억나는데요. 제가 어렸을 때 집에서 담배를 많이 키웠어요. 그래서 어려서부터 담배를 많이 날랐거든요. 근데 앞에 우리 언니가 하얀 원피스를 입고 담뱃잎을 이렇게 끌고 가고 저는 뒤따라가는 장면이 기억나요. 저도 담배를 하나 집었겠죠. (웃음) 담배는 잎이 거의 없었고 제 기억에 언니가 담배 키 반보다 조금 작았으니까 한 대여섯 살이었을 것 같고 저는 네다섯 살이었을 것 같아요. 그게 제 생애 첫 기억이자 농사에 대한 첫 기억이에요.
장정우 그럼 아주 어려서부터 농사일을 같이 하셨네요. 어린 시절에 농사일을 엄청나게 많이 하셔서 농사를 싫어하셨다는 이야기를 전해 들었던 기억이 나거든요. 그때 이야기를 들려주실 수 있을까요?
오도 저희 부모님이 홍동에서 유기농업을 시작한 1세대에요. 1975년, 풀무학교 고등부에 일본의 애농학교 고다이 주니치 선생님이 오셔서 유기농업에 대한 설명을 했어요. 그 후 1976년도부터 홍동 농민들이 유기농업을 본격적으로 시작했거든요. 비료나 농약을 쓰지 않고요. 그런데 비료, 농약을 안 쓰니까 우리가 다 풀을 매야 되는 거예요.
지금 같은 여름이면 밖이 캄캄할 때 부모님이 우릴 막 깨워요. 그럼 일어나서 경운기를 타고 밭으로 가요. 나지막한 산 하나를 넘어야 했거든요. 이른 새벽이라 집집마다 굴뚝에서 하얗게 연기가 올라오는 걸 보면서요. 참고로 저희 집은 가난했으니까 땅이 없어서 다 임대를 했어요. 임대를 하면 산골짜기에 밭을 준단 말이에요. 산에 있는 밭이다 보니 돌이 엄청 많았어요. 그래서 새벽 5시에 밭에 가서 하는 일이, 경운기 불빛에 의존해서 돌을 골라내는 일이었어요.
돌을 담으면 볏짚으로 꼬아서 만든 일반 망태기는 금방 삭아서 다 떨어져요. 그래서 저희는 양쪽에 나무 손잡이가 달린 굵은 철사로 엮은 쇠망태기를 썼어요. 거기다 돌을 담아서 밭 가장자리로 나르는 거예요. 그러면 손에 막 다 못(굳은살)이 배겼어요. 옛날에 어렸을 때는 손이 아주 딱딱했어요. 맨날 수업 시간에 굳은살을 뜯고 그랬어요. 그러다 7시쯤 되면 엄마가 막내 손 붙잡고 밥 다라이를 이고 와요. 그러면 거기서 밥을 먹어요. 그리고 가방 들고 걸어서 초등학교까지 가곤 했죠. 그때는 버스도 없었어요. 제가 4~5학년 때 우리 동네에 버스가 들어왔어요. 학교에서 공부를 마치면 걸어서 다시 밭으로 가요. 그다음에 해 떨어지면 집으로 돌아왔죠. 제가 이런 이야기를 하면 사람들이 1960년대 사람이냐고 그래요. (웃음)
그렇게 고등학교 때까지 다녔어요. 그때 풀무고등학교는 모두 기숙사 생활을 하는 것은 아니었거든요. 그 당시 제 꿈이 시험기간에 공부하는 거였어요. 부모님은 시험기간만 되면 학교가 더 일찍 끝나니까 일을 더 많이 준비해놔요. 다른 친구들은 홍성에 있는 독서실에서 공부하는데 저만 혼자 버스 타고 집에 가야 했어요. 공부 못해서 밤에 잠자면서 막 울고 그랬어요.
장정우 그럼 공부를 더 하고 싶어서 유학을 가신 건가요? 일본에서 공부를 하신 걸로 아는데 그때 이야기를 좀 더 듣고 싶습니다.
오도 그때 풀무학교를 안 갔으면 유기농에 대해서 관심이 안 생겼을 수도 있을 것 같아요. 그런데 유기농업을 가르치는 풀무학교에서 공부도 하고, 농사도 배우다 보니 유기농이라는 가치가 정말 중요하게 여겨졌어요. 그래서 유기농업이 일본에서 왔으니까, 일본에 가면 좀 더 자세히 배울 수 있겠구나 생각했어요. 그때 당시에 풀무학교와 연이 닿아 졸업생 중 한 명은 게이센대학교로 유학을 갈 수 있었거든요. 어차피 집을 떠날 생각이 있으니 일본 가서 유기농업을 배울까 한 거죠.
장정우 그런데 유기농을 배우러 유학을 가셨는데 원예를 전공하셨어요.
오도 처음 일본에 갔는데 들어가는 입구부터 학교 정원의 꽃이 너무 예쁜 거예요. (웃음) 들어가는 입구부터 온통 다 꽃밭인데 4월이면 팬지가 피었을 때거든요. 전 처음 본 거죠. 세상에 이런 아름다운 꽃이 있구나. 들어가면서부터 기숙사까지 가는 길이 너무 예쁜 거예요. 원래는 가서도 유기농업을 계속 공부하려고 했어요. 근데 2학년 때 전공을 선택하려는데 1년 동안 있어 보니… 제가 44회 졸업생이에요. 그럼 44년 동안 한 학년이 100명이니까 총 학생이 200명이거든요. 200명의 여학생이 기숙사 생활을 해요. 그러면서 정원을 가꿔요. 영국식 정원으로. 44년 동안 그렇게 가꿔진 학교인 거예요. 그러니 얼마나 예뻤겠어요. 저는 지금도 우리나라에서는 그렇게 아름다운 정원을 본 적이 없어요. 1년 동안 있어 보니까 채소 키우는 것보다 꽃 가꾸는 게 훨씬 쉽고 재밌더라고요.
채소는 수확물이 있어야 되잖아요. 꽃은 꽃만 피우면 되는 거예요. 또 그 자체로 너무 아름답고 그런 풍경 속에 있으니까 사람들이 너무 행복해하고요. 제가 살았던 우리나라의 70~80년대 시골 농촌하고는 너무 다르잖아요. 꽃이 있으면 사람들이 이렇게 달라지는구나 느꼈어요. 근데 우리나라에 시골에 꽃이 없지? 전 도시는 가본 적이 없었으니까 그때까지 우리나라에서는 왜 꽃을 안 키우지? 이렇게 생각하면서 나중에 고향에 가면 꽃을 많이 심어야 되겠다, 어렵게 일하는 사람들도 꽃을 보면 좋아하지 않을까 그런 생각을 했던 것 같아요. 그래서 2학년 때는 전공을 꽃 재배로 하고 3학년 때는 화단 설계를 전공했어요. 유기농은 안 하고. (웃음)
장정우 그럼 유학 후에, 시골에 꽃을 심어서 우리나라의 어렵게 사는 농민들을 행복하게 해주겠다는 꿈은 어떻게 이어졌나요?
오도 그다음에 안 이어졌어요. (웃음) 졸업하고 한국에 오려고 하니 원예 공부를 해서 우리나라에 갈 데가 어딘지 모르겠는 거예요. 그래서 곰곰이 생각했죠. 한국 가서 어떤 일을 하지? 일본에서 공부해서 우리나라 꽃 이름도 하나도 몰랐고 학명밖에 몰랐어요. 그래서 고민을 하다 식물원에 취직해서 돈도 벌면서 식물 공부를 해야겠다 싶었어요.
그래서 지도를 펴놓고 일단 우리 집하고 제일 먼 데가 어딘가 찾은 거죠. 우리 집하고 제일 먼 곳이 제주도였는데, 마침 이모님이 제주도에 사셔서, 이모한테 제주도에 식물원이 있나 물어봤죠. (웃음) 근데 제주도에 여미지식물원이라는 곳이 있다는 거예요. 그래서 취직을 했죠. 4년 동안 근무를 했는데 일이 복잡했어요. 알고 보니 여미지식물원이 삼풍백화점 거였어요. 저는 당시에 일본에 있어서 전후 상황을 몰랐죠. 취직이 돼서 갔더니 직원들이 다 데모를 하고 있는 거예요. 여미지식물원이 삼풍백화점 거니까 식물원을 팔아서 유족들한테 줄 보상금을 마련해야 됐던 거예요. 여미지식물원에서 근무했던 사람들이 다 해고당할 처지였던 거죠. 그러니까 여미지식물원에서 오랫동안 일했던 분들이 전원 고용 승계해달라고 파업을 하고 있었어요. 전 그것도 모르고 원서를 낸 거예요. 일할 사람이 없으니까 그분들 대타로 제가 거기 취직이 된 거죠.
이야기를 들어보니 이분들 사정이 너무 딱한 거예요. 그래서 들어가자마자 조합에 가입을 했죠. 들어보니 너무 사정이 딱했고 또 중요한 게 이분들이 사물을 할 줄을 모르더라고요. (웃음) 마침 저희 아빠가 농민운동을 하셔서 우리 4남매가 사물놀이를 꽤 잘했거든요.
장정우 그래서 그 이후에 어떻게 되셨나요?
오도 열심히 조합 일을 했죠. 그래서 4년 만에 전원 고용 승계 따냈어요. 그때 전원 고용 승계가 되니까 서울시 공무원에 준하는 월급을 주더라고요. 기존 월급에서 2배가 올라갔어요. 근데 저는 딱 한 번 받았어요. 원래 식물 공부하러 갔던 건데 다시 식물 공부를 해야겠다는 마음에 그만두고 나왔죠.
좀 더 알아보니 천리포수목원이 식물 공부를 더 할 수 있겠더라고요. 그렇게 천리포수목원에서 열심히 일을 하고 있었는데 전공부에서 원예교사가 필요하다고 해서 결국 고향으로 돌아왔죠. 풀무학교 교장 선생님이 찾아오셔서 풀무학교 전공부라는 곳을 만들었는데 성인들이 다니는 농사학교다, 농사를 가르치는 학교지만 정원이 아름다운 학교였으면 좋겠다고 하셨어요. 고민이 됐죠. 저는 천리포수목원 원장님을 아주 존경했거든요. 결혼하고 살 집을 주셔서 거기서 평생 살려고 했어요. 그랬는데 교장 선생님이 와서 말씀하시니까 또 마음이 그런 거예요. 저는 농사가 싫어서 고향을 떠났는데 농사를 배우러 오겠다는 학생들이 있다고 하니까요. 계속 고민하다가 제가 처음 일본에 갔을 때 정원을 보고 아름다웠던 기억들, 추억들을 농사 배우러 오는 친구들한테도 알려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결국엔 전공부에 가기로 결정을 했어요.
전공부에 간 후, 처음에는 원예수업만 했어요. 농사일 안 하고 원예교사로 꽤 오랫동안 일했죠. 농사실습은 장 선생님이 하시고 저는 원예실습만 하고 정원만 가꾸고 그랬어요. 그러다가 어느 해인가 장마 전이었어요. 하루는 제가 학생들하고 꽃을 심고 있었어요. 그런데 비가 온다는 거예요. 그때 밭에서 뭔가 거둬들일 게 있었어요. 양파인지, 감자인지. 그때 원예실습 시간이었는데 장 선생님이 갑자기 오시더니 학생들 보고 다 차에 타라는 거예요, 저랑 실습하고 있는데. 그러더니 지금 날씨가 어떤지 아냐고 화를 내시는 거예요. 그렇게 학생들 다 태우고 가버리셨어요. 그래서 저 혼자서 일하면서 막 울었어요. 울면서 꽃을 심고 나서 어떡해요. 급하니까 저도 가야 할 거 아니에요. 그래서 가서 일을 하는데 장 선생님이 제가 밭에서 일하는 걸 그때 처음 보신 거예요.
그 뒤로 저한테 자꾸 밭에 가자고 하는 거예요. (웃음) 자꾸 밭에 가자고 논에 가자고 하시는 거예요. 원예실습 아닐 때는 저도 제 일 해야 하는데 말이죠. 그런데 어떡해요, 가자니까 가야지. 그러다가 선생님이 그만두시기 몇 년 전쯤에 후임을 구해야 되잖아요. 선생님이 나보고 그냥 오 선생이 후임 해, 이러신 거예요. (웃음) 그래서 몇 년을 따라다니면서 배웠죠.
농사학교 풀무학교 전공부에서 가르치고 배운 것
문수영 전공부 이야기를 이어서 하면, 전공부에 재직하신 지 거의 20년이 되셨는데요. 20년 동안 일해오시면서 느끼는 소회라든지, 초창기 때랑 지금과의 차이점이 있으면 말씀해주세요.
오도 처음에 저는 농사일이 힘들다는 걸 아니까 가능하면 밭에 안 나갔단 말이에요. 근데 이제 학생들, 선생님들하고 같이 일하면서 되게 많이 배운 것 같아요. 저는 어릴 때부터 그냥 시키는 일만 했던 건데, 학교에서 같이 일하고, 밥 해먹고, 참도 먹고, 떠들고, 웃고 하면서 어렸을 때 생긴 농사에 대한 생각이 점점 바뀌어간 것 같아요. 농사가 왜 중요한지, 왜 해야 하는지, 혼자 할 땐 힘들지만 같이 하면 얼마든지 즐겁게 할 수 있다는 걸 알아간 것 같아요. 농사가 단지 어려운 것만은 아니라는 걸 전공부 와서 처음 알게 된 거죠. 그러면서 수업 시간이나 선생님들이 일할 때 학생들한테 해주는 이야기를 들으면서 농사가 아름다운 일이라는 걸 깨달았어요.
처음에는 제가 해야 할 일만 봤다면 그다음부터는 배우는 게 훨씬 많았어요. 무엇이든 학생들에게 가르치려니까 제가 공부를 해야 하더라고요. 힘든데도 좋았어요. 학생들에게 알려주려면 정확한 걸 가르쳐야 하고 틀리면 안 되잖아요. 그럼 계속 자료를 찾아야 되니까 이런 과정이 제가 어려서 못했던 공부에 대한 갈급함이 채워지는 시간이었어요. 일본어를 잘 아니까 학교에 있는 일본어 자료들을 보고 공부해서 학생들한테 알려줄 때 즐거움도 있었고요.
학교라는 곳은 시간이 흐를수록 역사가 쌓이는 곳이잖아요. 처음에는 아무것도 없었던 공간이지만, 학생들이 들어오고 같이 생활하면서 공간을 만들어가는 과정이 저한테 중요했던 것 같아요. 제가 여기서 일하는 만큼 학교의 역사랑 같이 흘러가는 느낌이랄까요. 그런 것들이 몹시 소중하다는 생각이 들어요.
장정우 출판기념회 때 《벼의 일 년》 공동저자 중 한 명인 김주련 님이 ‘누군가와 같이 하는 게 관찰의 노하우다’라고 이야기했던 게 기억이 나는데요. 사실 개별 농가들에서는 여러 명이서 농사를 짓는 경우가 많지 않잖아요. 뭔가를 같이 하는 것들, 벼 관찰도 전공부였기 때문에 가능하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벼 관찰 외에 전공부에서 시도했던 경험들이 또 어떤 것들이 있을까요?
오도 전공부에 있으면서 《텃밭정원 가이드북》과 《씨앗 받는 농사 매뉴얼》이라는 책을 냈는데, 이 책들도 《벼의 일 년》과 마찬가지로 우리나라에 자료가 없으니 학교 교과서를 만들어야겠다고 생각해서 시작한 거예요. 다 학교에서 필요하고 학생들과 같이 해서 할 수 있었던 거죠. 제가 먼저 책을 만들어야겠다고 한 건 하나도 없어요. 혼자 했으면 절대 못했을 거예요. 학생들이 궁금해하는 부분에 대답을 해줘야 되는데, 제가 모르는 부분도 있으니까 자료를 찾거나 학생들과 같이 공부한 것들을 정리하다 보니 책이 된 거죠.
학교에 안 왔으면 안 했을 것 같아요. 결국에는 학생들이 배움을 준 거죠. 궁금해하니까. 전공부 8기, 9기 친구들하고 씨앗 공부하던 게 생각나는데요. 그 친구들이 일하면서 자꾸 질문을 했어요. 종묘상에서 산 씨앗은 왜 색깔이 알록달록한지부터 시작해서 여러 질문들을 했어요. 저는 일본에서 계속 공부를 하고 학교에 오기 전에는 식물원에서 줄곧 일했기 때문에 거의 10년 만에 유통되는 씨앗을 처음 봐서 그게 살충제가 묻은 건지, 염색액이 묻은 건지 전혀 몰랐어요. 제가 모르는 부분이지만 또 학생들한테 알려줘야 하니까 여러 자료를 찾다 보니 종묘상에서 유통되는 F1 씨앗에 대한 문제가 심각한 거예요. 그래서 같이 씨앗 공부를 해보자고 해서 학생들하고 공부를 시작한 거죠.
씨앗 공부할 때도 우리나라에 씨앗 관련 책이 없어서 일본어 책으로 공부를 했어요. 일본에 있는 선배한테 씨앗 책을 보내줬는데, 당시 제 아이들이 너무 어려서 시간이 많지 않았거든요. 그러니까 학생들이 뭐랬는지 아세요? (웃음) 새벽에 나오래요. 애들 잘 때. 그래서 새벽에 6시에 학교에 나와서 같이 번역하면서 공부하고 애들 깨기 전에 들어가서 어린이집 갈 준비해서 보내고 다시 학교 오고 그랬어요. 그때 그 친구들이 저를 그렇게 공부를 시켰어요. (웃음)
장정우 전공부가 20여 년 만에 교육과정에 약간의 변화가 생겼어요. 전공부 외에 농촌으로 오는 여러 통로가 생긴 상황에서 전공부가 고민하고 있는 바에 대해 이야기해주시면 어떨까요? 전공부 실습과정에 대해서 소개를 해주셔도 좋고요.
오도 전공부가 2001년도에 개교를 하고 쭉 2년제 과정을 유지해왔어요. 그러다가 한 4~5년 전부터 전공부에 학생들이 들어오지 않는다는 이야기가 나오면서 고민이 되게 많았어요. 말한 것처럼 다양한 귀농귀촌 프로그램들이 생기면서 그런 영향이 확실히 있는 것 같아요. 그렇지만 제 경험으로는 지금 24년째인데 학생이 한 번도 안 들어온 적은 없었어요. 그리고 전공부는 늘 학생이 별로 없었어요. (웃음)
사실 앞으로도 갑자기 농사를 짓겠다는 사람이 엄청 늘어나지는 않을 것 같아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금 이 시대에 꼭 필요한 거는 농촌, 농사라고 생각해요. 그리고 농촌과 농사가 꼭 필요하다고 느껴 전공부를 찾는 사람이 분명히 있기 때문에, 한 명이 오더라도 풀무학교만큼은 농사를 배우러 오는 학생들을 위해 문을 열고 있어야 한다고 생각해요. 농사를 지으려는 사람이 없다는 것은 한두 해 나온 이야기는 아니잖아요. 다만 삶을 살아갈 때 어떤 가치를 가지고 어떤 방향으로 가느냐가 중요하다고 생각을 해요.
지금까지 전공부를 졸업한 학생이 한 130명 가까이 되거든요. 저희가 조사를 해보니 그중 70~80%는 농사와 관련된 일을 하거나 농사를 짓고 있고요. 50여 명은 홍동에 있어요. 저는 그것만으로도 전공부에서 진짜 큰 역할을 했다고 보거든요. 농촌에서 꼭 농사를 짓지 않더라도 자기가 할 수 있는 일, 좋아하는 일, 설령 꼭 일이 없더라도 농촌에서 생활을 하는 사람이 있다는 게 중요하다고 보기 때문에, 50명 가까이 홍동면에 남아 있다는 건 전공부가 제 역할을 해온 거라고 생각해요.
전공부가 2년제로 학교를 운영한 건 계절의 흐름에 따라서 농사 경험을 하려면 최소 2년은 걸리기 때문이에요. 가을에 심어서 겨울을 나고 봄에 수확하는 작물도 있기 때문에 전체 과정을 보려면 최소한 2년이 필요하거든요. 2023년도까지 계속 2년제로 운영을 하다가 올해 처음으로 한 달 살이, 4개월 과정, 6개월 과정, 1년 과정으로 실습교육생 제도를 열었어요. 한 달 살이 했던 세 분은 이제 끝나고 가셨는데, 그중에 두 분은 10월에 홍동으로 오시기로 했어요. 아예 귀농귀촌을 하신다면서 집을 알아봐달라고 하시더라고요. 전공부를 통해서 농촌을 알아간다는 것이 정말 중요한 것 같아요.
다만 2년 과정이 유지됐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어요. 농사의 전체 흐름을 못 보는 게 아쉽기도 하고 2년 과정이 주는 무게감이 확실히 있거든요. 1년째는 농사를 알아가는 과정이라고 하면 2년째는 주도적으로 자기가 농사를 직접 해보는 경험이 되니까 학생들의 태도도, 농사를 대하는 마음도 달라지는 것 같아요. 그리고 짧은 실습과정을 통해서는 원래 전공부에서 하려는 교육, 같이 농사짓고 공부하고 밥을 해서 나누어 먹는 일이 잘 안 돼요. 부족함이 느껴져요. 그래서 다른 선생님들은 어떨지 모르겠지만, 저는 개인적으로 단기과정을 가져가더라도 2년 과정이 꼭 필요하다는 생각을 해요.
중요한 것은 농부의 마음
장정우 마지막 질문입니다. 농사를 지으려는 사람들, 농촌에 애정을 쏟는 사람들이 점점 줄고 있습니다. 농사를 짓고, 농사를 가르치는 사람으로서 이 상황을 극복하기 위해 우리가 무엇을 할 수 있을까요?
오도 처음에는 농사가 중요해, 농부가 필요해 이런 얘기들을 많이 하잖아요. 그런데 질문을 받고 왜 나는 농사가 필요할까? 내가 왜 농사를 지어야 되지? 다 농사가 중요하다고 하는데 나는 왜 농사가 중요하다고 느끼지? 스스로 물어봤어요. 지금에 와서 제 생각은 농사가 중요하다기보다 농사짓는 농부의 마음이 중요한 것 같아요.
장정우 어떤 차이가 있을까요?
오도 농사를 지어보니까 제가 할 수 있는 게 별로 없다는 생각이 들어요. 그러니까 사람이 할 수 있는 게 별로 없어요, 씨를 뿌리고 심는다. 그게 끝이에요. 생각해보면 씨앗을 뿌려도 자연이 키워주는 거고 햇빛하고 바람하고 물하고 공기가 해주는 거지, 제가 하는 건 김매기밖에 없고 작물을 온전히 다 키우는 건 땅속 미생물하고 자연이 해주잖아요. 비도 자연이 내려주고. 그래서 자연 앞에서 겸손해진달까요. 제가 농사를 짓는 게 아니라 커다란 자연 속에서 그저 제가 할 수 있는 걸 한다는 마음이 들고요.
또 한 가지는 농사는 옆에 있는 사람들이 아주 중요한 것 같아요. 특히 저는 학교에 있으니까 학생들하고 같이 일하면서 옆에 있는 사람이 얼마나 소중한지 알게 돼요. 오늘도 아침에 참깨를 솎았는데 혼자 하면 며칠을 해야 할 일인데 같이 하니까 한나절이면 하잖아요. 엄청 뜨거웠거든요. 뜨거운 데서 같이 일하다 보면 뭔가 신뢰감이 절로 생겨요. 곰곰이 생각해보면 사람이 타인을 온전하게 신뢰할 수 있는 경우가 얼마나 될까요? 저는 운이 좋게 전공부에 있으면서 전공부에 오는 친구들하고 온전하게 신뢰를 주고받으면서 지낼 수 있던 것 같아요.
그리고 기후위기 시대에 순환적인 삶을 살 수 있는 방법은 농촌·농사밖에 없다는 생각이 들어요. 이건 풀무학교가 처음 개교할 때부터 한 이야기인데 자급자족하면서 자립해서 살 수 있는 삶은 농촌에서만 가능하다는 거죠. 그래서 농촌이 중요한 것 같고요.
얼마 전에 루돌프 슈타이너의 《자연과 사람을 되살리는 길》을 읽었는데 머리말에 그런 이야기가 있었어요. ‘내가 먹는 음식이 나의 생각을 지배한다.’ 그 문장을 보면서 많은 생각이 들더라고요. 제가 어떤 것을 먹는지 선택함에 따라서 제 생각이 바뀔 수 있다는 거잖아요. 그동안은 유기농이 필요하고 중요하니까 해야 한다는 단순한 생각이었다면, 그 문장을 보고 나서는 사람의 생각이 먹는 것과 연결되어 있다는 걸 깨닫게 되었달까요. 밥 한 공기만 봐도 그렇잖아요. 이 쌀이 어디서 오는지 알아야 하는 거죠. 이 쌀이 논에서 오고, 그걸 키우는 농부가 있고, 그걸 수확하기 위해 에너지가 들어가는데 그 에너지는 어디에서 오는지 역으로 계속 생각해보면 결국에는 이거 하나만 제대로 알면 다 볼 수 있는 거죠. 하나만 제대로 볼 수 있으면. 그 연결됨을 농사를 통해서 알아주면 좋겠다는 바람이 있어요.
또 지난겨울에 예산홍성환경운동연합에서 하는 강의를 들은 적이 있어요. 사실 기후위기를 극복할 수 있는 방법을 생각하면 참 막막하잖아요. 그런데 강의에서 지구에 있는 인구의 80%가 채식을 하면 지금의 기후위기를 면할 수 있다고 하더라고요. 결국 농사가 답이라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예를 들어 살면서 차를 안 쓰고 전기를 안 쓰는 건 너무 어렵잖아요. 근데 채식만 하면 된대. 이건 해야겠다는 생각이 드는 거예요. 제 주변에 10명이 있으면 8명만 하면 되잖아요. ‘당장 비행기를 멈춰야 돼’ 같은 큰 거를 생각하는 게 아니라 제가 지금 여기서 할 수 있는 것, 농부로서 할 수 있는 것들을 해나가야 되지 않나 싶어요.
'농農익는 대화'를 통해 농본이 가진 질문에 대한 답을 구하는 인터뷰를 담을 예정이다. 기후위기가 심화되는 가운데 프랑스 철학자 브뤼노 라투르가 명명한 ‘녹색 계급’이란 개념이 주목받고 있다. ‘녹색 계급’을 ‘살아가는 수단으로서의 세계’와 ‘사람들이 살고 있는 장소로서의 세계’를 연결하는 집단이라고 정의한다면, 실제로 우리의 터전에 ‘녹색’을 채워나가는 농민들이야말로 대표적인 ‘녹색 계급’이라고 할 수 있다. 이번 농農익는 대화에서는 지난 20여 년간 꿋꿋이 농사 교육을 해오고 있는 풀무학교 전공부(이하 전공부) 농업교사인 오도 선생님의 이야기를 담았다.
1년 동안 벼를 관찰한 기록, 책이 되다
장정우 전공부 학생들과 함께 1년 동안 벼를 관찰한 기록이 《벼의 일 년》이라는 책으로 출간됐습니다. 지난 6월 3일에는 마을도서관에서 출간기념회가 열리기도 했는데요. 책 소개와 더불어 벼를 관찰하게 된 계기를 설명해주실 수 있을까요?
오도 《벼의 일 년》이라는 제목처럼 벼의 생애를 담은 책이에요. 몇 년 전, 전공부에서 농사 실습을 담당하셨던 선생님 두 분이 은퇴를 하시면서 제가 본격적으로 모든 농사 실습을 도맡게 됐어요. 어릴 적부터 부모님 농사를 도왔고 전공부 농사 실습에 계속 참여해와서 농사일 자체는 익숙하지만, 학생들에게 알려주려니 막상 작물에 대해서 제대로 아는 게 없더라고요. 특히 논농사를 주관하는 건 처음이라 논에서 자라는 벼에 대해서 알아야 했어요. 그래서 자료를 찾는데 우리나라엔 자료가 없었어요. 농법에 대한 건 많은데 벼라는 작물 자체에 대한 건 아무리 찾아도 없는 거예요.
그러던 중 일본에서 발행된 작물 시리즈가 생각났어요. 그 출판사의 시리즈 중에 벼를 주제로 엮은 게 있었어요. 2000년대 초반에 람사르 협약이 맺어지고 논을 습지로 보는 관점이 생기면서 논생물 조사를 마을에서 많이 했거든요. 당시에 우리나라에 자료가 없어서 그 시리즈를 구해서 참고했어요. 마침 그중에 한 권이 벼 관찰에 대한 책이어서 전공부 학생들과 함께 읽기 시작했죠. 그런데 읽다 보니 너무 재밌는 거예요. 제가 전혀 몰랐던 사실들이 나와있어서 책에서 나온 내용이 실제로 그런지 학생들하고 공부하면서 관찰해보자고 이야기가 흘러갔죠. 책에 설명이 되어 있지만 직접 관찰하지 않는 이상 이해가 가지 않는 부분도 있었고요. 그래서 벼 관찰을 시작하게 됐어요.
관찰을 시작할 때는 책으로 만들 생각은 없었어요. 하다 보니 우리가 매일매일 밥을 먹는데 먹는 밥에 대해서, 쌀에 대해서 아는 게 없다는 걸 알았어요. 부끄럽기도 하고 우리나라에 이런 자료가 없다는 게 아쉬웠는데, 학생 중에 우리의 활동을 정리해보고 싶다는 친구가 있어서 부족하더라도 기록을 남기자는 마음으로 책을 만들게 됐어요.
장정우 쌀이 주식이라고 하지만, 도시에 사는 분들이 많기 때문에 벼나 논이 낯선 분들이 많을 것 같습니다. 그런 분들에게 꼭 소개하고 싶은 책의 내용이 있을까요?
오도 제일 기억에 남는 장면은 밥 한 공기에 몇 알이 들어가는지 세어보려고 한 알 한 알 늘어놓았던 거예요. 하루에 이렇게 많은 쌀을 먹고 있구나 하며 새삼 놀랐어요. 밥 한 공기에 벼 세 포기가 들어가는데 하루 세 끼 먹으면 아홉 포기잖아요. 볍씨 한 알이 하나의 식물체가 되는 거거든요. 생각해보면 저도 하나의 생명체고 볍씨도 하나의 생명체인 거예요. 그걸 온몸으로 알아차리고 나니 무섭기도 하고. 제가 하루에 세 끼 먹으면 1만 5천 알을 먹는 건데 1만 5천 개의 생명이 제 몸속으로 들어오는 거잖아요. 볍씨 한 알도 자신의 역할이 있을 거고 하나의 생각이 있을 텐데, 그렇게 따지니까 내가 너무 많이 먹는다… (웃음) 이렇게 살아도 되나 그런 생각이 들기도 했어요.
논에서 벼를 베면 냄새가 나요. 풀을 베도 냄새가 나거든요. 어느 날 학생들과 벼를 베며 냄새가 난다고 막 얘기를 했어요. 그랬더니 전공부 동료 교사였던 장길섭 선생님이 그게 사람으로 따지면 벼가 피 흘리는 거야, 그러셨거든요.(웃음) 걔가 죽어서 내가 살 수 있는 거야, 그런 얘기를 해주셨어요. 지금도 그게 두고두고 생각이 나요. 내가 하루에 이렇게 많은 생명을 먹고 있구나… 볍씨 한 알 한 알 놓으면서 많은 생각이 들었어요.
저는 개인적으로 이 책을 밥 먹는 사람은 다 봐야 한다고 생각해요. 벼라는 작물을 우리가 매일 먹으며 늘상 접하는데 잘 모르고 지나치는 부분이 너무 많은 것 같아요. 누구도 알려주지 않고 가르쳐주지 않기 때문에요.
장정우 그 외에 오도 선생님이 중요하게 생각하는 논 혹은 벼농사의 가치가 있다면 소개해주세요.
오도 우리나라가 식량자급률이 높지 않잖아요.
장정우 네, 최근 발표에 따르면 곡물자급률이 20%까지 떨어졌어요. 이제 밥을 홍콩, 일본보다 덜 먹거나 비슷한 수준이 됐죠. 1인당 쌀 소비량이 60kg 대가 깨졌어요.
오도 1인당 쌀 소비량이 약 56kg 정도로 보더라고요. 어쨌든 자급률이 엄청 낮은데 그중에서 쌀만 90% 이상의 자급률을 유지하고 있죠. 다른 작물에 비해서는 그만큼 우리나라에서 쌀 생산을 많이 한다는 얘기이기도 해요. 실제로 우리가 도시 밖으로 나오면 여전히 논을 쉽게 볼 수 있잖아요.
저는 개인적으로 논이 아름답다는 걸 사람들이 많이 느꼈으면 해요. 텅 빈 겨울의 논도 예쁜데 쟁기질했을 때의 논과 물이 가둬졌을 때의 논, 벼가 심어졌을 때, 벼가 익어가는 때, 각각이 너무 아름답잖아요. 물을 가뒀을 때는 호수 같고 그렇잖아요. 우리가 몰라서 그렇지 논이 주는 아름다움은 우리 한국 사람들한테는 아주 중요한 정서적 바탕일 것 같아요. 논을 보며 아름답다는 말을 입 밖으로 얘기하지 않아도, 논이 주는 경관의 아름다움이 사람들 마음속에 있지 않을까요?
또 하나는 논은 물을 가두잖아요. 기후위기 때문에 지하수가 부족해진다고 하는데, 논은 지하수위를 높일 수 있는 물 저장고 같은 역할을 하거든요. 논에 물을 가두면 증발하면서 공기 중의 습도를 유지해주기도 하고요. 그래서 논은 단지 벼만 생산하는 곳이 아니라, 우리 삶에서 물을 순환시키는 역할도 하는 거죠.
그리고 논에는 다양한 생물이 많아요. 120~150여 종의 논생물이 사는데 작은 생물이 많거든요. 논생물은 먹이사슬에서 가장 기초적인 역할을 해요. 논생물이 없으면 다른 동물이나 생물도 살아갈 수 없는 거죠. 논이 생태계의 기반이 된다는 사실을 사람들이 알면 좋겠어요.
마지막으로 논농사는 다른 농사와 달리 혼자 하기 어렵잖아요. 같이 일을 하는 데서 오는 장점이 있죠. 이웃하고 옆에서 같이 일하는 사람하고 느끼는 그런 것들. 서로 도와가며 해야 한다는 점이요.
농사를 싫어하던 아이가 농업학교의 교사가 되기까지
장정우 그렇다면, 오도 선생님이 가지고 계신 농사에 대한 첫 기억은 어떤 걸까요?
오도 네 살쯤이라고 기억해요. 일을 한 건 아니고 제가 본 장면이 기억나는데요. 제가 어렸을 때 집에서 담배를 많이 키웠어요. 그래서 어려서부터 담배를 많이 날랐거든요. 근데 앞에 우리 언니가 하얀 원피스를 입고 담뱃잎을 이렇게 끌고 가고 저는 뒤따라가는 장면이 기억나요. 저도 담배를 하나 집었겠죠. (웃음) 담배는 잎이 거의 없었고 제 기억에 언니가 담배 키 반보다 조금 작았으니까 한 대여섯 살이었을 것 같고 저는 네다섯 살이었을 것 같아요. 그게 제 생애 첫 기억이자 농사에 대한 첫 기억이에요.
장정우 그럼 아주 어려서부터 농사일을 같이 하셨네요. 어린 시절에 농사일을 엄청나게 많이 하셔서 농사를 싫어하셨다는 이야기를 전해 들었던 기억이 나거든요. 그때 이야기를 들려주실 수 있을까요?
오도 저희 부모님이 홍동에서 유기농업을 시작한 1세대에요. 1975년, 풀무학교 고등부에 일본의 애농학교 고다이 주니치 선생님이 오셔서 유기농업에 대한 설명을 했어요. 그 후 1976년도부터 홍동 농민들이 유기농업을 본격적으로 시작했거든요. 비료나 농약을 쓰지 않고요. 그런데 비료, 농약을 안 쓰니까 우리가 다 풀을 매야 되는 거예요.
지금 같은 여름이면 밖이 캄캄할 때 부모님이 우릴 막 깨워요. 그럼 일어나서 경운기를 타고 밭으로 가요. 나지막한 산 하나를 넘어야 했거든요. 이른 새벽이라 집집마다 굴뚝에서 하얗게 연기가 올라오는 걸 보면서요. 참고로 저희 집은 가난했으니까 땅이 없어서 다 임대를 했어요. 임대를 하면 산골짜기에 밭을 준단 말이에요. 산에 있는 밭이다 보니 돌이 엄청 많았어요. 그래서 새벽 5시에 밭에 가서 하는 일이, 경운기 불빛에 의존해서 돌을 골라내는 일이었어요.
돌을 담으면 볏짚으로 꼬아서 만든 일반 망태기는 금방 삭아서 다 떨어져요. 그래서 저희는 양쪽에 나무 손잡이가 달린 굵은 철사로 엮은 쇠망태기를 썼어요. 거기다 돌을 담아서 밭 가장자리로 나르는 거예요. 그러면 손에 막 다 못(굳은살)이 배겼어요. 옛날에 어렸을 때는 손이 아주 딱딱했어요. 맨날 수업 시간에 굳은살을 뜯고 그랬어요. 그러다 7시쯤 되면 엄마가 막내 손 붙잡고 밥 다라이를 이고 와요. 그러면 거기서 밥을 먹어요. 그리고 가방 들고 걸어서 초등학교까지 가곤 했죠. 그때는 버스도 없었어요. 제가 4~5학년 때 우리 동네에 버스가 들어왔어요. 학교에서 공부를 마치면 걸어서 다시 밭으로 가요. 그다음에 해 떨어지면 집으로 돌아왔죠. 제가 이런 이야기를 하면 사람들이 1960년대 사람이냐고 그래요. (웃음)
그렇게 고등학교 때까지 다녔어요. 그때 풀무고등학교는 모두 기숙사 생활을 하는 것은 아니었거든요. 그 당시 제 꿈이 시험기간에 공부하는 거였어요. 부모님은 시험기간만 되면 학교가 더 일찍 끝나니까 일을 더 많이 준비해놔요. 다른 친구들은 홍성에 있는 독서실에서 공부하는데 저만 혼자 버스 타고 집에 가야 했어요. 공부 못해서 밤에 잠자면서 막 울고 그랬어요.
장정우 그럼 공부를 더 하고 싶어서 유학을 가신 건가요? 일본에서 공부를 하신 걸로 아는데 그때 이야기를 좀 더 듣고 싶습니다.
오도 그때 풀무학교를 안 갔으면 유기농에 대해서 관심이 안 생겼을 수도 있을 것 같아요. 그런데 유기농업을 가르치는 풀무학교에서 공부도 하고, 농사도 배우다 보니 유기농이라는 가치가 정말 중요하게 여겨졌어요. 그래서 유기농업이 일본에서 왔으니까, 일본에 가면 좀 더 자세히 배울 수 있겠구나 생각했어요. 그때 당시에 풀무학교와 연이 닿아 졸업생 중 한 명은 게이센대학교로 유학을 갈 수 있었거든요. 어차피 집을 떠날 생각이 있으니 일본 가서 유기농업을 배울까 한 거죠.
장정우 그런데 유기농을 배우러 유학을 가셨는데 원예를 전공하셨어요.
오도 처음 일본에 갔는데 들어가는 입구부터 학교 정원의 꽃이 너무 예쁜 거예요. (웃음) 들어가는 입구부터 온통 다 꽃밭인데 4월이면 팬지가 피었을 때거든요. 전 처음 본 거죠. 세상에 이런 아름다운 꽃이 있구나. 들어가면서부터 기숙사까지 가는 길이 너무 예쁜 거예요. 원래는 가서도 유기농업을 계속 공부하려고 했어요. 근데 2학년 때 전공을 선택하려는데 1년 동안 있어 보니… 제가 44회 졸업생이에요. 그럼 44년 동안 한 학년이 100명이니까 총 학생이 200명이거든요. 200명의 여학생이 기숙사 생활을 해요. 그러면서 정원을 가꿔요. 영국식 정원으로. 44년 동안 그렇게 가꿔진 학교인 거예요. 그러니 얼마나 예뻤겠어요. 저는 지금도 우리나라에서는 그렇게 아름다운 정원을 본 적이 없어요. 1년 동안 있어 보니까 채소 키우는 것보다 꽃 가꾸는 게 훨씬 쉽고 재밌더라고요.
채소는 수확물이 있어야 되잖아요. 꽃은 꽃만 피우면 되는 거예요. 또 그 자체로 너무 아름답고 그런 풍경 속에 있으니까 사람들이 너무 행복해하고요. 제가 살았던 우리나라의 70~80년대 시골 농촌하고는 너무 다르잖아요. 꽃이 있으면 사람들이 이렇게 달라지는구나 느꼈어요. 근데 우리나라에 시골에 꽃이 없지? 전 도시는 가본 적이 없었으니까 그때까지 우리나라에서는 왜 꽃을 안 키우지? 이렇게 생각하면서 나중에 고향에 가면 꽃을 많이 심어야 되겠다, 어렵게 일하는 사람들도 꽃을 보면 좋아하지 않을까 그런 생각을 했던 것 같아요. 그래서 2학년 때는 전공을 꽃 재배로 하고 3학년 때는 화단 설계를 전공했어요. 유기농은 안 하고. (웃음)
장정우 그럼 유학 후에, 시골에 꽃을 심어서 우리나라의 어렵게 사는 농민들을 행복하게 해주겠다는 꿈은 어떻게 이어졌나요?
오도 그다음에 안 이어졌어요. (웃음) 졸업하고 한국에 오려고 하니 원예 공부를 해서 우리나라에 갈 데가 어딘지 모르겠는 거예요. 그래서 곰곰이 생각했죠. 한국 가서 어떤 일을 하지? 일본에서 공부해서 우리나라 꽃 이름도 하나도 몰랐고 학명밖에 몰랐어요. 그래서 고민을 하다 식물원에 취직해서 돈도 벌면서 식물 공부를 해야겠다 싶었어요.
그래서 지도를 펴놓고 일단 우리 집하고 제일 먼 데가 어딘가 찾은 거죠. 우리 집하고 제일 먼 곳이 제주도였는데, 마침 이모님이 제주도에 사셔서, 이모한테 제주도에 식물원이 있나 물어봤죠. (웃음) 근데 제주도에 여미지식물원이라는 곳이 있다는 거예요. 그래서 취직을 했죠. 4년 동안 근무를 했는데 일이 복잡했어요. 알고 보니 여미지식물원이 삼풍백화점 거였어요. 저는 당시에 일본에 있어서 전후 상황을 몰랐죠. 취직이 돼서 갔더니 직원들이 다 데모를 하고 있는 거예요. 여미지식물원이 삼풍백화점 거니까 식물원을 팔아서 유족들한테 줄 보상금을 마련해야 됐던 거예요. 여미지식물원에서 근무했던 사람들이 다 해고당할 처지였던 거죠. 그러니까 여미지식물원에서 오랫동안 일했던 분들이 전원 고용 승계해달라고 파업을 하고 있었어요. 전 그것도 모르고 원서를 낸 거예요. 일할 사람이 없으니까 그분들 대타로 제가 거기 취직이 된 거죠.
이야기를 들어보니 이분들 사정이 너무 딱한 거예요. 그래서 들어가자마자 조합에 가입을 했죠. 들어보니 너무 사정이 딱했고 또 중요한 게 이분들이 사물을 할 줄을 모르더라고요. (웃음) 마침 저희 아빠가 농민운동을 하셔서 우리 4남매가 사물놀이를 꽤 잘했거든요.
장정우 그래서 그 이후에 어떻게 되셨나요?
오도 열심히 조합 일을 했죠. 그래서 4년 만에 전원 고용 승계 따냈어요. 그때 전원 고용 승계가 되니까 서울시 공무원에 준하는 월급을 주더라고요. 기존 월급에서 2배가 올라갔어요. 근데 저는 딱 한 번 받았어요. 원래 식물 공부하러 갔던 건데 다시 식물 공부를 해야겠다는 마음에 그만두고 나왔죠.
좀 더 알아보니 천리포수목원이 식물 공부를 더 할 수 있겠더라고요. 그렇게 천리포수목원에서 열심히 일을 하고 있었는데 전공부에서 원예교사가 필요하다고 해서 결국 고향으로 돌아왔죠. 풀무학교 교장 선생님이 찾아오셔서 풀무학교 전공부라는 곳을 만들었는데 성인들이 다니는 농사학교다, 농사를 가르치는 학교지만 정원이 아름다운 학교였으면 좋겠다고 하셨어요. 고민이 됐죠. 저는 천리포수목원 원장님을 아주 존경했거든요. 결혼하고 살 집을 주셔서 거기서 평생 살려고 했어요. 그랬는데 교장 선생님이 와서 말씀하시니까 또 마음이 그런 거예요. 저는 농사가 싫어서 고향을 떠났는데 농사를 배우러 오겠다는 학생들이 있다고 하니까요. 계속 고민하다가 제가 처음 일본에 갔을 때 정원을 보고 아름다웠던 기억들, 추억들을 농사 배우러 오는 친구들한테도 알려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결국엔 전공부에 가기로 결정을 했어요.
전공부에 간 후, 처음에는 원예수업만 했어요. 농사일 안 하고 원예교사로 꽤 오랫동안 일했죠. 농사실습은 장 선생님이 하시고 저는 원예실습만 하고 정원만 가꾸고 그랬어요. 그러다가 어느 해인가 장마 전이었어요. 하루는 제가 학생들하고 꽃을 심고 있었어요. 그런데 비가 온다는 거예요. 그때 밭에서 뭔가 거둬들일 게 있었어요. 양파인지, 감자인지. 그때 원예실습 시간이었는데 장 선생님이 갑자기 오시더니 학생들 보고 다 차에 타라는 거예요, 저랑 실습하고 있는데. 그러더니 지금 날씨가 어떤지 아냐고 화를 내시는 거예요. 그렇게 학생들 다 태우고 가버리셨어요. 그래서 저 혼자서 일하면서 막 울었어요. 울면서 꽃을 심고 나서 어떡해요. 급하니까 저도 가야 할 거 아니에요. 그래서 가서 일을 하는데 장 선생님이 제가 밭에서 일하는 걸 그때 처음 보신 거예요.
그 뒤로 저한테 자꾸 밭에 가자고 하는 거예요. (웃음) 자꾸 밭에 가자고 논에 가자고 하시는 거예요. 원예실습 아닐 때는 저도 제 일 해야 하는데 말이죠. 그런데 어떡해요, 가자니까 가야지. 그러다가 선생님이 그만두시기 몇 년 전쯤에 후임을 구해야 되잖아요. 선생님이 나보고 그냥 오 선생이 후임 해, 이러신 거예요. (웃음) 그래서 몇 년을 따라다니면서 배웠죠.
농사학교 풀무학교 전공부에서 가르치고 배운 것
문수영 전공부 이야기를 이어서 하면, 전공부에 재직하신 지 거의 20년이 되셨는데요. 20년 동안 일해오시면서 느끼는 소회라든지, 초창기 때랑 지금과의 차이점이 있으면 말씀해주세요.
오도 처음에 저는 농사일이 힘들다는 걸 아니까 가능하면 밭에 안 나갔단 말이에요. 근데 이제 학생들, 선생님들하고 같이 일하면서 되게 많이 배운 것 같아요. 저는 어릴 때부터 그냥 시키는 일만 했던 건데, 학교에서 같이 일하고, 밥 해먹고, 참도 먹고, 떠들고, 웃고 하면서 어렸을 때 생긴 농사에 대한 생각이 점점 바뀌어간 것 같아요. 농사가 왜 중요한지, 왜 해야 하는지, 혼자 할 땐 힘들지만 같이 하면 얼마든지 즐겁게 할 수 있다는 걸 알아간 것 같아요. 농사가 단지 어려운 것만은 아니라는 걸 전공부 와서 처음 알게 된 거죠. 그러면서 수업 시간이나 선생님들이 일할 때 학생들한테 해주는 이야기를 들으면서 농사가 아름다운 일이라는 걸 깨달았어요.
처음에는 제가 해야 할 일만 봤다면 그다음부터는 배우는 게 훨씬 많았어요. 무엇이든 학생들에게 가르치려니까 제가 공부를 해야 하더라고요. 힘든데도 좋았어요. 학생들에게 알려주려면 정확한 걸 가르쳐야 하고 틀리면 안 되잖아요. 그럼 계속 자료를 찾아야 되니까 이런 과정이 제가 어려서 못했던 공부에 대한 갈급함이 채워지는 시간이었어요. 일본어를 잘 아니까 학교에 있는 일본어 자료들을 보고 공부해서 학생들한테 알려줄 때 즐거움도 있었고요.
학교라는 곳은 시간이 흐를수록 역사가 쌓이는 곳이잖아요. 처음에는 아무것도 없었던 공간이지만, 학생들이 들어오고 같이 생활하면서 공간을 만들어가는 과정이 저한테 중요했던 것 같아요. 제가 여기서 일하는 만큼 학교의 역사랑 같이 흘러가는 느낌이랄까요. 그런 것들이 몹시 소중하다는 생각이 들어요.
장정우 출판기념회 때 《벼의 일 년》 공동저자 중 한 명인 김주련 님이 ‘누군가와 같이 하는 게 관찰의 노하우다’라고 이야기했던 게 기억이 나는데요. 사실 개별 농가들에서는 여러 명이서 농사를 짓는 경우가 많지 않잖아요. 뭔가를 같이 하는 것들, 벼 관찰도 전공부였기 때문에 가능하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벼 관찰 외에 전공부에서 시도했던 경험들이 또 어떤 것들이 있을까요?
오도 전공부에 있으면서 《텃밭정원 가이드북》과 《씨앗 받는 농사 매뉴얼》이라는 책을 냈는데, 이 책들도 《벼의 일 년》과 마찬가지로 우리나라에 자료가 없으니 학교 교과서를 만들어야겠다고 생각해서 시작한 거예요. 다 학교에서 필요하고 학생들과 같이 해서 할 수 있었던 거죠. 제가 먼저 책을 만들어야겠다고 한 건 하나도 없어요. 혼자 했으면 절대 못했을 거예요. 학생들이 궁금해하는 부분에 대답을 해줘야 되는데, 제가 모르는 부분도 있으니까 자료를 찾거나 학생들과 같이 공부한 것들을 정리하다 보니 책이 된 거죠.
학교에 안 왔으면 안 했을 것 같아요. 결국에는 학생들이 배움을 준 거죠. 궁금해하니까. 전공부 8기, 9기 친구들하고 씨앗 공부하던 게 생각나는데요. 그 친구들이 일하면서 자꾸 질문을 했어요. 종묘상에서 산 씨앗은 왜 색깔이 알록달록한지부터 시작해서 여러 질문들을 했어요. 저는 일본에서 계속 공부를 하고 학교에 오기 전에는 식물원에서 줄곧 일했기 때문에 거의 10년 만에 유통되는 씨앗을 처음 봐서 그게 살충제가 묻은 건지, 염색액이 묻은 건지 전혀 몰랐어요. 제가 모르는 부분이지만 또 학생들한테 알려줘야 하니까 여러 자료를 찾다 보니 종묘상에서 유통되는 F1 씨앗에 대한 문제가 심각한 거예요. 그래서 같이 씨앗 공부를 해보자고 해서 학생들하고 공부를 시작한 거죠.
씨앗 공부할 때도 우리나라에 씨앗 관련 책이 없어서 일본어 책으로 공부를 했어요. 일본에 있는 선배한테 씨앗 책을 보내줬는데, 당시 제 아이들이 너무 어려서 시간이 많지 않았거든요. 그러니까 학생들이 뭐랬는지 아세요? (웃음) 새벽에 나오래요. 애들 잘 때. 그래서 새벽에 6시에 학교에 나와서 같이 번역하면서 공부하고 애들 깨기 전에 들어가서 어린이집 갈 준비해서 보내고 다시 학교 오고 그랬어요. 그때 그 친구들이 저를 그렇게 공부를 시켰어요. (웃음)
장정우 전공부가 20여 년 만에 교육과정에 약간의 변화가 생겼어요. 전공부 외에 농촌으로 오는 여러 통로가 생긴 상황에서 전공부가 고민하고 있는 바에 대해 이야기해주시면 어떨까요? 전공부 실습과정에 대해서 소개를 해주셔도 좋고요.
오도 전공부가 2001년도에 개교를 하고 쭉 2년제 과정을 유지해왔어요. 그러다가 한 4~5년 전부터 전공부에 학생들이 들어오지 않는다는 이야기가 나오면서 고민이 되게 많았어요. 말한 것처럼 다양한 귀농귀촌 프로그램들이 생기면서 그런 영향이 확실히 있는 것 같아요. 그렇지만 제 경험으로는 지금 24년째인데 학생이 한 번도 안 들어온 적은 없었어요. 그리고 전공부는 늘 학생이 별로 없었어요. (웃음)
사실 앞으로도 갑자기 농사를 짓겠다는 사람이 엄청 늘어나지는 않을 것 같아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금 이 시대에 꼭 필요한 거는 농촌, 농사라고 생각해요. 그리고 농촌과 농사가 꼭 필요하다고 느껴 전공부를 찾는 사람이 분명히 있기 때문에, 한 명이 오더라도 풀무학교만큼은 농사를 배우러 오는 학생들을 위해 문을 열고 있어야 한다고 생각해요. 농사를 지으려는 사람이 없다는 것은 한두 해 나온 이야기는 아니잖아요. 다만 삶을 살아갈 때 어떤 가치를 가지고 어떤 방향으로 가느냐가 중요하다고 생각을 해요.
지금까지 전공부를 졸업한 학생이 한 130명 가까이 되거든요. 저희가 조사를 해보니 그중 70~80%는 농사와 관련된 일을 하거나 농사를 짓고 있고요. 50여 명은 홍동에 있어요. 저는 그것만으로도 전공부에서 진짜 큰 역할을 했다고 보거든요. 농촌에서 꼭 농사를 짓지 않더라도 자기가 할 수 있는 일, 좋아하는 일, 설령 꼭 일이 없더라도 농촌에서 생활을 하는 사람이 있다는 게 중요하다고 보기 때문에, 50명 가까이 홍동면에 남아 있다는 건 전공부가 제 역할을 해온 거라고 생각해요.
전공부가 2년제로 학교를 운영한 건 계절의 흐름에 따라서 농사 경험을 하려면 최소 2년은 걸리기 때문이에요. 가을에 심어서 겨울을 나고 봄에 수확하는 작물도 있기 때문에 전체 과정을 보려면 최소한 2년이 필요하거든요. 2023년도까지 계속 2년제로 운영을 하다가 올해 처음으로 한 달 살이, 4개월 과정, 6개월 과정, 1년 과정으로 실습교육생 제도를 열었어요. 한 달 살이 했던 세 분은 이제 끝나고 가셨는데, 그중에 두 분은 10월에 홍동으로 오시기로 했어요. 아예 귀농귀촌을 하신다면서 집을 알아봐달라고 하시더라고요. 전공부를 통해서 농촌을 알아간다는 것이 정말 중요한 것 같아요.
다만 2년 과정이 유지됐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어요. 농사의 전체 흐름을 못 보는 게 아쉽기도 하고 2년 과정이 주는 무게감이 확실히 있거든요. 1년째는 농사를 알아가는 과정이라고 하면 2년째는 주도적으로 자기가 농사를 직접 해보는 경험이 되니까 학생들의 태도도, 농사를 대하는 마음도 달라지는 것 같아요. 그리고 짧은 실습과정을 통해서는 원래 전공부에서 하려는 교육, 같이 농사짓고 공부하고 밥을 해서 나누어 먹는 일이 잘 안 돼요. 부족함이 느껴져요. 그래서 다른 선생님들은 어떨지 모르겠지만, 저는 개인적으로 단기과정을 가져가더라도 2년 과정이 꼭 필요하다는 생각을 해요.
중요한 것은 농부의 마음
장정우 마지막 질문입니다. 농사를 지으려는 사람들, 농촌에 애정을 쏟는 사람들이 점점 줄고 있습니다. 농사를 짓고, 농사를 가르치는 사람으로서 이 상황을 극복하기 위해 우리가 무엇을 할 수 있을까요?
오도 처음에는 농사가 중요해, 농부가 필요해 이런 얘기들을 많이 하잖아요. 그런데 질문을 받고 왜 나는 농사가 필요할까? 내가 왜 농사를 지어야 되지? 다 농사가 중요하다고 하는데 나는 왜 농사가 중요하다고 느끼지? 스스로 물어봤어요. 지금에 와서 제 생각은 농사가 중요하다기보다 농사짓는 농부의 마음이 중요한 것 같아요.
장정우 어떤 차이가 있을까요?
오도 농사를 지어보니까 제가 할 수 있는 게 별로 없다는 생각이 들어요. 그러니까 사람이 할 수 있는 게 별로 없어요, 씨를 뿌리고 심는다. 그게 끝이에요. 생각해보면 씨앗을 뿌려도 자연이 키워주는 거고 햇빛하고 바람하고 물하고 공기가 해주는 거지, 제가 하는 건 김매기밖에 없고 작물을 온전히 다 키우는 건 땅속 미생물하고 자연이 해주잖아요. 비도 자연이 내려주고. 그래서 자연 앞에서 겸손해진달까요. 제가 농사를 짓는 게 아니라 커다란 자연 속에서 그저 제가 할 수 있는 걸 한다는 마음이 들고요.
또 한 가지는 농사는 옆에 있는 사람들이 아주 중요한 것 같아요. 특히 저는 학교에 있으니까 학생들하고 같이 일하면서 옆에 있는 사람이 얼마나 소중한지 알게 돼요. 오늘도 아침에 참깨를 솎았는데 혼자 하면 며칠을 해야 할 일인데 같이 하니까 한나절이면 하잖아요. 엄청 뜨거웠거든요. 뜨거운 데서 같이 일하다 보면 뭔가 신뢰감이 절로 생겨요. 곰곰이 생각해보면 사람이 타인을 온전하게 신뢰할 수 있는 경우가 얼마나 될까요? 저는 운이 좋게 전공부에 있으면서 전공부에 오는 친구들하고 온전하게 신뢰를 주고받으면서 지낼 수 있던 것 같아요.
그리고 기후위기 시대에 순환적인 삶을 살 수 있는 방법은 농촌·농사밖에 없다는 생각이 들어요. 이건 풀무학교가 처음 개교할 때부터 한 이야기인데 자급자족하면서 자립해서 살 수 있는 삶은 농촌에서만 가능하다는 거죠. 그래서 농촌이 중요한 것 같고요.
얼마 전에 루돌프 슈타이너의 《자연과 사람을 되살리는 길》을 읽었는데 머리말에 그런 이야기가 있었어요. ‘내가 먹는 음식이 나의 생각을 지배한다.’ 그 문장을 보면서 많은 생각이 들더라고요. 제가 어떤 것을 먹는지 선택함에 따라서 제 생각이 바뀔 수 있다는 거잖아요. 그동안은 유기농이 필요하고 중요하니까 해야 한다는 단순한 생각이었다면, 그 문장을 보고 나서는 사람의 생각이 먹는 것과 연결되어 있다는 걸 깨닫게 되었달까요. 밥 한 공기만 봐도 그렇잖아요. 이 쌀이 어디서 오는지 알아야 하는 거죠. 이 쌀이 논에서 오고, 그걸 키우는 농부가 있고, 그걸 수확하기 위해 에너지가 들어가는데 그 에너지는 어디에서 오는지 역으로 계속 생각해보면 결국에는 이거 하나만 제대로 알면 다 볼 수 있는 거죠. 하나만 제대로 볼 수 있으면. 그 연결됨을 농사를 통해서 알아주면 좋겠다는 바람이 있어요.
또 지난겨울에 예산홍성환경운동연합에서 하는 강의를 들은 적이 있어요. 사실 기후위기를 극복할 수 있는 방법을 생각하면 참 막막하잖아요. 그런데 강의에서 지구에 있는 인구의 80%가 채식을 하면 지금의 기후위기를 면할 수 있다고 하더라고요. 결국 농사가 답이라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예를 들어 살면서 차를 안 쓰고 전기를 안 쓰는 건 너무 어렵잖아요. 근데 채식만 하면 된대. 이건 해야겠다는 생각이 드는 거예요. 제 주변에 10명이 있으면 8명만 하면 되잖아요. ‘당장 비행기를 멈춰야 돼’ 같은 큰 거를 생각하는 게 아니라 제가 지금 여기서 할 수 있는 것, 농부로서 할 수 있는 것들을 해나가야 되지 않나 싶어요.